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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원면 가양리 이공린 신도비(米院面 佳陽里 李公麟 神道碑) 본문
미원면 가양리에서 수락영당이 있는 수ㅡ락동으로 가다보면 경주이씨묘지가 있는 오른쪽 산능성밑에 자리하고 있다.
경주이씨묘원에 이공린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이 묘갈이 신도비를 대신하고 있다.
공의 휘(諱)는 공린(公麟)이요, 자(字)는 백시(伯時)요, (자호(自號)는 용면 거사(龍眠居士)로,) 경주(慶州)의 저명한 성씨이다. 6대조 휘 제현(齊賢)은 호(號)가 익재(益齋)인데 고려(高麗) 때 귀현(貴顯)하여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으며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이 당시에 제일 높았다. 그로부터 고관(高官)이 서로 이어져 세상의 명가(名家)가 되었다. 관찰사(觀察使) 휘 윤인(尹仁)에 이르러 만호(萬戶) 홍중량(洪仲良)의 딸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는데, 홍씨(洪氏) 역시 세족(世族)이다.
공은 성품이 순박하고 자질이 아름다웠으며 원대한 기상이 있었다. 젊어서 장인(丈人)인 박팽년(朴彭年)의 죄에 연좌(連坐)되어 폐고(廢錮)되어 벼슬하지 못하다가 모년(某年)에야 비로소 벼슬하여 무반직(武班職)에 이름이 들었다. 다시 천거되어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겸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이 되었다. 이어 함열(咸悅)과 창평(昌平)의 수령(守令)으로 나가 모두 선정(善政)을 베풀어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은혜를 생각하였다.
아들 여덟을 두었으니, 이오(李鼇)ㆍ이귀(李龜)ㆍ이원(李黿)ㆍ이타(李鼉)ㆍ이별(李鼈)ㆍ이벽(李鼊)ㆍ이경(李鯁)ㆍ이곤(李鯤)인데 모두 재자(才子)였다. 이오는 진사시(進士試)에 장원하고 이귀ㆍ이원과 함께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는데, 이오는 좌랑(佐郞)이요, 이귀는 면천 군수(沔川郡守)요, 이원은 예조 좌랑이다. 이타와 이별, 이벽은 모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이경과 이곤 역시 학업이 성취되었다. 이원은 무오 사화(戊午士禍) 옥사(獄事)에 걸려 외방으로 귀양 갔다가 갑자년(甲子年, 1504년 연산군 10년) 학정(虐政)에 사죄(死罪)를 더하였는데 그의 허물이 아니었다. 아버지 및 형제들이 모두 연좌되어 먼 외방으로 유배되었다. 공도 이 때문에 창평 현령(昌平縣令)에서 파직되어 3년 동안 해남(海南)으로 귀양을 갔는데, 성주(聖主, 중종)께서 등극하여 억울하게 죽은 자에게는 증직(贈職)하고, 유배한 사람은 방환(放還)하고 그 관작(官爵)을 회복시켰다.
공은 여러 차례 화환(禍患)을 겪은데다가 나이 또한 늙어서 조정에서 벼슬할 생각이 없어 청주(淸州) 집으로 물러나 한가하게 지내다가 모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몇 살이다. 그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어느 곳에다 장사 지냈다. 여러 아들들이 상의하여 묘갈(墓碣)을 세워 그 연덕(年德)과 계파(系派)를 나타내어 후세에 밝게 보이고자 나 신용개에게 명(銘)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이귀ㆍ이원씨와 마음을 허여하여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자고 약속하고, 공을 뵙고 당하(堂下)에서 자란 것이 아주 미더웠고 아주 오래이므로 사실대로 명(銘)하는 것을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자신에게는 인색하나 후손에게는 풍부하네. 선(善)한 자에는 경사(慶事) 있어 자제들이 아름답네. 집안이 큰 화를 당했으나 망하지는 않았네. 이곳에 유택(幽宅) 있으니 영원히 평안하리.이공린[李公麟]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자라를 먹지 않는 경주 이씨(익재공파)
연산군 때의 갑자사화로 사형 당한 이원의 모친은 사육신 박팽년의 딸이었다. 그의 부친 이공린이 혼례날 밤 꿈에 늙은 첨지 여덟 명이 절하면서 "우리들이 장차 솥에 삶겨서 죽게 됐는데, 만약 죽을 생명을 살려 주시면 후하게 은혜를 갚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놀라서 깨어보니 종이 자라 여덟 마리를 막 국에 넣으려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이공린이 즉시 자라를 강물에 놓아 보내라고 명령했는데, 어린 종이 실수로 그 중 한 마리를 자라목을 끊어 죽고 말았다. 그날 밤에 이공린은 첨지 일곱 명이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결혼 후 이공린은 여덟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꿈의 상서로움을 기념하기 위해 자라나 물고기와 관련이 있는 한자를 사용했다.
그후 이공린은 아들 8명을 낳았는데 이름이 ①별(鼈, 자라별) ②구(龜, 거북구) ③오(鼇, 자라오) ④타(鼉, 자라타) ⑤원(黿, 자라원) ⑥경(䲔, 숫컷고래경) ⑦곤(鯤, 곤이곤) ⑧용(龍, 용용)이다. 8명의 아들 이름이 ‘자라’와 이와 유사한 바다 동물이다. 모두 재주가 있어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③오(鼇)는 진사를 하고, ②구(龜)와 ⑤원(黿)은 문과에 급제했다.(대동기문)
[신청리에 있는 박팽년의 사우입니다]
그후 사화로 희생된 이원이 어린 종에게 죽은 자라라고 해석되면서 그 꿈은 더 확실하게 믿게 됐으며
현재 연려실기문에서 부계기문을 인용해 ‘지금도 이씨(경주)익재공파들은 자라를 먹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수락영당에 있는 이공린의 유허비를 보면 여덞아들의 이름을 모두 기둥에 한사람씩 새겨놓았다.
아들 여덟을 두었으니, 이오(李鼇)ㆍ이귀(李龜)ㆍ이원(李黿)ㆍ이타(李鼉)ㆍ이별(李鼈)ㆍ이벽(李鼊)ㆍ이경(李鯁)ㆍ이곤(李鯤)인데 모두 재자(才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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