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미원면 가양리 이공린묘비(米院面 佳陽里 李公麟 墓碑)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미원면 가양리 이공린묘비(米院面 佳陽里 李公麟 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6. 22. 17:57





미원면 가양리 수락동에 자리하고 있는 경주인 이공린의 묘비입니다.

묘비에 전면에는 통훈대부행창평현령이공지묘(通訓大夫行昌平縣令李公之墓)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이공린의 무덤은 후손들에 의하여 새로 개축이 되었습니다.

새로 호석(護石)을 두르고 문인석과 장명등 등을 만들었습니다.


이공린은 본관은 경주(慶州). 이제현(李齊賢)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관찰사 이윤인(李尹仁)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났고 포부가 원대하였다. 그러나 장인 박팽년(朴彭年)의 죄에 연좌되어 몇년간 관직에 나갈 수가 없었다.

그 뒤 사면되어 무반의 직을 잠시 가졌다가 천거로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가 되고, 한성부참군을 겸하였다. 이어 흥덕현감·함열현감·창평현감을 역임하면서 향리를 잘 통솔하고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아들 이원(李黿)의 죄에 연좌되어 해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에 의하여 풀려났다. 여러 번 자신의 죄가 아닌 일에 연좌되었고, 또 나이가 많아 관직에 있기를 바라지 않았으므로 청주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이공린은 성품이 순박하고 자질이 아름다웠으며 원대한 기상이 있었다. 젊어서 장인(丈人)인 박팽년(朴彭年)의 죄에 연좌(連坐)되어 폐고(廢錮)되어 벼슬하지 못하다가 모년(某年)에야 비로소 벼슬하여 무반직(武班職)에 이름이 들었다. 다시 천거되어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겸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이 되었다. 이어 함열(咸悅)과 창평(昌平)의 수령(守令)으로 나가 모두 선정(善政)을 베풀어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은혜를 생각하였다.

아들 여덟을 두었으니, 이오(李鼇)이귀(李龜)이원(李黿)이타(李鼉)이별(李鼈)이벽(李鼊)이경(李鯁)이곤(李鯤)인데 모두 재자(才子)였다. 이오는 진사시(進士試)에 장원하고 이귀이원과 함께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는데, 이오는 좌랑(佐郞)이요, 이귀는 면천 군수(沔川郡守), 이원은 예조 좌랑이다. 이타와 이별, 이벽은 모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이경과 이곤 역시 학업이 성취되었다.

이원은 무오사화(戊午士禍) 옥사(獄事)에 걸려 외방으로 귀양 갔다가 갑자년(甲子年, 1504년 연산군 10) 학정(虐政)에 사죄(死罪)를 더하였는데 그의 허물이 아니었다. 아버지 및 형제들이 모두 연좌되어 먼 외방으로 유배되었다. 공도 이 때문에 창평 현령(昌平縣令)에서 파직되어 3년 동안 해남(海南)으로 귀양을 갔는데, 성주(聖主, 중종)께서 등극하여 억울하게 죽은 자에게는 증직(贈職)하고, 유배한 사람은 방환(放還)하고 그 관작(官爵)을 회복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