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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면 송계리 이주승,이조승창의숭모비(寒水面 松界里 李胄承,李肇承倡義崇慕碑) 본문

울고넘는박달재/제천시(堤川市)

한수면 송계리 이주승,이조승창의숭모비(寒水面 松界里 李胄承,李肇承倡義崇慕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8. 7. 09:34



한수면 송계1구에 위치하고 있는 이주승.이조승선생창의숭모비입니다.

비석의 건비는 1989년 10월에 세웠습니다.제원군에서 건비지원금을 지원하였습니다.



이주승(李胄承)은 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대재(大哉), 호는 휘암(徽菴)·은구와(隱求窩)이다. 명문가로 이름 있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후손이다.

동생으로 유인석(柳麟錫)의 종사로 활동한 이조승(李肇承)이 있다.


이주승(李胄承)[1870~1946]은 선공감 감역관을 지냈으며, 1895년(고종 32) 제천 을미의병 때 가문의 재력과 중앙 및 지방에 널리 퍼져 있던 연고를 동원하여 여러모로 의병을 도왔다. 제천 의진이 충주성을 공략할 때 충주향교의 도유사 이벽원(李壁遠)과 지방대 두령 김성한(金成漢) 등을 시켜 의병에 내응하게 하였고, 권호선(權灝善)·이면재(李冕宰) 등과 함께 청풍 쪽으로 우회하던 신지수(辛芝秀)의 별동 부대를 지원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가 살던 제천의 한수면 북노리는 제천과 충주 사이에 있어 의병들의 행군로에 중요한 거점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 후 적의 공격이 심화되자 일본군과 관군을 분리시키기 위해 서울에 파견되어 조정의 고관과 접촉하면서 왕의 영단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을미의병이 실패한 후에도 살미면 골운의 토지를 팔아 유인석의 재기를 지원하였으며, 1907년(순종 1) 정미의병 때에도 이강년(李康秊) 의진의 좌종사로서 수안보 석문리 부근의 토지를 팔아 적극 후원하였다. 만년에는 의병에 관련한 귀중한 문서를 모아서 후대에 전해지도록 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조승은 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이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기중(紀中), 호는 관의재(寬毅齋)이다.


이조승(李肇承)[1873~1900]은 제천시 한수면 북노리에 살았다. 일찍이 이인구(李寅龜)·지운상(池運象) 등에게 배웠고, 나중에 유중교(柳重敎)가 장담으로 내려오자 그 문하에 들어가서 배움을 청하였고 유치원(兪致元)에게도 배웠다. 유중교가 세상을 뜬 후에는 유인석(柳麟錫)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장담마을에서 추진하였던 『성재집(省齋集)』을 발간하는 일에 동참하였다.

1895년(고종 32) 말, 단발령이 내리고 장담의 선비들이 처신 방법을 논의할 때 스승과 함께 망명 노선을 선택하였으나 안승우(安承禹) 등 장담의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키고 유인석을 대장으로 추대하자 홍선표(洪選杓)·이기진(李起振)·정화용·이정규(李正奎) 등과 함께 대장 종사가 되어 종군하여 작전 계획과 여러 전투에 참여하였다.

호좌의진이 근거지로 삼았던 제천에서 관군에게 패한 후에는 서울로 올라가 의병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돌리기 위하여 애쓰다가 서북 지방을 향해 이동하는 대장진을 뒤따랐다. 유인석이 중국으로 망명하자 홍선표 등과 함께 스승을 좇았으며, 청나라로부터 도움을 받기 위하여 선양[瀋陽]까지 다녀왔는데, 병으로 귀국하여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유인석의 뒤를 좇아 중국을 다녀온 기록인 『서행일기(西行日記)』가 전하는데, 호좌의진이 장기렴에게 패한 후 의병들의 동향을 엿보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책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