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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진천읍 삼덕리 임연장군사적비(鎭川邑 三德里 林衍將軍史蹟碑) 본문
고려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무신이자 권신.
- [가계]
본관은 상산(常山)[진주(鎭州), 현재의 진천]. 초명은 승주(承柱). 아버지는 누구인지 모르며, 어머니는 이씨로 진주(鎭州) 주리(州吏)의 딸이다. ‘상산’이라는 본관은 상산임씨의 시조인 임희가 상산백(常山伯)에 봉작된 것에서 유래한다. 후손들이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구산동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 [활동사항]
임연(林衍)[?~1270]은 지금의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에서 태어났다. 벌과 같은 눈매와 승냥이 같은 소리를 내는, 즉 봉목시성(蜂目豺聲)의 험상궂은 인상을 가졌으며 재빠르고 힘이 세어 능히 몸을 엎드려 팔로 다니며 기와를 지붕 위로 던졌다고 한다. 일찍이 대장군 송언상(宋彦祥)의 군중(軍中)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시양졸(廝養卒)로 일하다가 고향에 돌아가 있었는데, 때마침 쳐들어 온 몽골군을 고향 사람들과 함께 물리친 공로로 대정(隊正)이 되었다.
그 뒤 김준(金俊)에게 발탁되어 낭장(郎將)에 올랐으며, 그 신임을 바탕으로 권세를 갖게 되었다. 임연은 김준을 ‘아버지’로, 김준의 동생 김충(金冲)을 숙부로 부를 만큼 밀접하게 지냈다. 1258년(고종 45) 김준·유경(柳璥) 등과 공모하여 당시의 권신(權臣)인 최의(崔竩)를 죽이고 정권을 왕실에 돌려준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에 녹훈되었고, 관직도 도령낭장(都令郎將)·상장군을 거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올랐다. 그리고 임연의 향리인 진천도 창의현(彰義縣)으로 승격되고 현령이 파견되었다.
이렇게 임연의 정치적 지위가 크게 상승하자 임연은 견제를 받게 되면서 정치적으로 소외되기 시작했다. 때마침 정권을 장악한 김준이 정치를 마음대로 하면서 국왕 원종이 김준을 제거할 뜻을 품고 그에 대적할 만한 인물로 임연을 주목하였다.
이에 1268년(원종 9) 환관 강윤소(康潤紹)·최은(崔嗯)·김경(金鏡)과 함께 김준을 죽이고, 그 아들들과 무리들도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다. 그럼으로써 사실상 임연의 집권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임연의 세력의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원종이 다시 측근인 김경·최은 및 어사대부 장계열(張季烈)과 대장군 기온(奇蘊) 등을 규합하여 임연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이에 임연은 야별초(夜別抄)를 보내어 이들마저 제압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와 화의가 진전되어 자신의 위치가 불안해지고 왕과의 사이도 벌어지자, 삼별초와 육번도방(六番都房)을 집결시켜 놓은 상태에서 재추(宰樞)와 왕의 폐립을 의논했다. 그리하여 원종 대신 동생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옹립하고 자신은 교정별감(敎定別監)이 되어 정치·군사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임연에 의한 원종의 폐위 사건은 많은 반발을 가져왔다. 먼저 서북면병마사의 영리(營吏)인 최탄(崔坦)이 반발하여 한신(韓愼)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그리고 용강(龍岡), 함종(咸從) 등 상당수의 현(縣)이 이 난에 호응하였다. 그러나 열세에 몰린 최탄이 원나라에 항복해 버렸는데, 원나라에서는 이를 계기로 자비령 이북 지방을 내속(內屬)시켜 동녕부(東寧府)라 부르고 최탄을 동녕부총관으로 삼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또한 때마침 원나라에 갔던 세자[뒤의 충렬왕]가 돌아오다가 압록강에 이르러 원종의 폐위 소식을 듣고 연경(燕京)으로 돌아가서 군대 파견을 요청하고자 하였다. 이에 임연은 원종의 폐립 사건이 누설될 것을 두려워하여 이장용(李藏用)을 원나라에 절일사(節日使)로 보내 세자를 돌아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장용은 오히려 원나라에 가서 왕의 폐립 전모를 상세히 보고했고, 이에 원나라에서 병부시랑 흑적(黑的)을 보내 이를 추궁하자 안경공을 폐하고 다시 원종을 복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원종의 폐위 및 복위와 관련된 일련의 과정에서 임연의 측근 및 정적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즉, 동지추밀원사였던 조오(趙璈)를 비롯하여 친종장군(親從將軍) 윤수(尹秀)가 반기를 들었으며, 유원적(兪元績)·조윤번(趙允潘) 등이 임연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1269년(원종 10) 원종이 흑적을 따라서 연경에 입조(入朝)하러 가게 되자 임연은 아들 임유간(林惟幹)을 같이 보냈지만, 원나라 황제는 임연에게 직접 연경에 와서 진상을 밝히라는 공문을 보냈다.
한편 원나라에 입조하였던 원종은 두 나라 사이의 화친을 위해 세자가 원나라의 부마가 될 것과 출륙환도(出陸還都)할 것, 권신의 제거 등을 약속하였고, 다시 원나라 군사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하였다. 이에 임연은 강화 조약을 거부하고 전국에 야별초를 보내 해도입거(海島入居), 즉 백성들을 섬으로 다시 들어가도록 독려하여 항거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270년(원종 11) 임연은 울분을 참지 못하다가 등창이 나서 회복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뒤이어 3개월 후에는 임연의 지위를 대신했던 아들 임유무(林惟茂)마저 그의 사위인 홍규(洪奎)에게 살해됨으로써 임연 정권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 [상훈과 추모]
아들 임유무의 요청으로 참지정사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장렬(莊烈)이다.
임연은 자신의 고향인 이곳에 농장을 경영하였는데 그의 사후 집터를 연못으로 만들어 동호라 불렀다고 한다.
사적비 뒤로 보이는 것이 동호지이다
지금은 관개시설의 완비로 연못의 형태를 찾을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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