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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남면 조촌리 전주최씨비석군(遠南面 助村里 全州崔氏碑石群)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음성군(陰城郡)

원남면 조촌리 전주최씨비석군(遠南面 助村里 全州崔氏碑石群)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0. 8. 17. 19:55

 

조촌2리 삼거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최익초는 (1910-1975)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재력이 있어야 한다며 일찌기 만주에 가서 각고의 노력끝에 많은 돈을 벌었다. 1943년에 자금 5만원으로 음성농업전수학교를 설립하여 현 음성중학교의 기반을 닦았고 같은 해에 조촌초등학교 설립부지 3500여평과 기금으로 1만원을 기부하여 지역사회 교육발전에 공헌한바가 컸으므로 1974년 교육공로자로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비석의 앞면에는 향산거사최공인영유적비(香山居士崔公仁榮遺蹟碑)라고 쓰여있다.뒷면에는 유적비명병서(遺蹟碑銘幷書)라는 비제(碑題)가 있다. 이 비문은 최상용(崔翔龍)이 찬(撰)하고 고인수(高仁洙)가 서(書) 하였다.최인영(1853-1912)은 자가 인춘(仁春)이고 호는 향산(香山)이다.저서로는 향산집(香山集)이 있다.최인영은 참봉 기선의 10세손으로 범현의 아들이다.어렸을적부터 경학에 열심이었으며 과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잘 가르쳐 잘못을 뉘우치게 하였고 문인들이 행적을 약술하여 조산에 유적비를 세웠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주백(周伯). 사과 최두수(崔斗壽)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동중추 최덕립(崔德立)이다. 아버지는 서부참봉 최기선(崔起先), 어머니는 진천임씨(鎭川林氏)로 임대성(林大誠)의 딸인데, 외할아버지는 판관 임수무(林秀茂)이다.

부인은 안동권씨로 권서(權澨)의 딸인데 자식 하나를 두었으며, 부인 단양우씨(丹陽禹氏)는 진사 우필량(禹弼亮)의 딸로 여섯 자식을 두었다. 아들은 최익륭(崔益隆), 최익홍(崔益弘), 최익명(崔益明), 최익성(崔益成), 최익장(崔益章), 최익흥(崔益興), 최익중(崔益重)을 두었다.


최세면은 천성이 침착하고 경망하지 않아 견문과 학식, 도량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말은 무겁고 행동거지는 떳떳하였다. 최세면은 효를 하늘에 심은 듯하였으며, 가세가 빈곤하여도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모양 없이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일부러 자기 몸을 상해가면서 스스로 농사일을 하였다.

1668년(현종 9) 겨울에 어머니 진천임씨가 병환이 있더니, 이듬해 봄에는 안성(安城) 객지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최세면은 주야로 끊임없이 통곡하였으며, 생시에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함을 슬퍼하였다. 가세가 빈곤하여 가족 중에 경기도사로 있는 사람과, 고을 군수 김안우(金安佑)가 협조하여 장례를 마쳤다.


묘소는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에 있다.1706년(숙종 32)에 정려를 받았고, 아버지 최기선(崔起先)에게는 장악원정(掌樂院正)이 증직되었고, 최세면에게는 호조참의가 증직되었다. 1899년(고종 36)에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에 ‘인효려(仁孝閭)’를 창건하고, 의정부참찬관 최유경(崔有慶), 증호조참의 최세면(崔世冕), 두 아들 통덕랑 최익명(崔益明)과 증동몽교관 최익성(崔益成)을 봉안하였다. 정인표(鄭寅杓)가 효행비문(孝行碑文)을 찬술하였다.

공이 묘 옆에 초려(草廬) 하나를 짓고 시묘살이하던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 문수봉 아래 동산(東山)에 있던 초려는 그 후 초당(草堂)이라 불러와 『읍지(邑誌)』에 전한다.

 

음성전주최씨, 백년넘게 종계를 운영한 까닭은 - 충북과 나의 연결고리 충북일보 (inews365.com)

 

음성전주최씨, 백년넘게 종계를 운영한 까닭은

[충북일보] 계(契)는 주로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받거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만든 전래의 민간협동 조직으로, 낙찰계·상포계·친목계 등의 종류가 있다. 조선후기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의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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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호조참의최공효행비라고 각자되어 있다.
귀부의 머리가 조금은 해학적인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