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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남면 문암리 경주정씨세파비(遠南面 文岩里 慶州鄭氏世派碑)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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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남면 문암리 경주정씨세파비(遠南面 文岩里 慶州鄭氏世派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0. 8. 17. 08:38

원남면 문암리 복호에 있는 비석입니다

 

문암리 평촌에서 금법너머가는 고갯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비석의 앞면에는 경주정씨세파비(慶州鄭氏世派碑)라고 쓰여 있으며 경주정씨양경공파에 대한 비문이 있다. 비석의 건립시기는 계유 오월(癸酉 五月)입니다.비석의 상태등으로 보아 1933년경으로 추정됩니다. 조선시대 경주정씨(慶州鄭氏)의 유지(遺地)를 표시하기 위해 세운 비(碑)입니다.

 

경주정씨 양경공파의 정희계는  1348(고려 충목왕 4)~1396(조선 태조 5) 고려 말 조선 초 문신, 호는 양성헌(養性軒) 문정공 문하시랑 평장사 진후(珍厚)의 7대손으로 유비창승(有備倉丞) 자초(子楚)의 손자이며 문충공 문하평리 휘(暉)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수첨의정승 화평부원군 김심(金深)의 딸이다.

 

1348년(충목왕 4) 3월 18일 개경 북안동(開京北安洞 : 현 개성 남대문 연복사 근처)에서 출생하였다. 1369년(공민왕 18) 진사문과에 합격하고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근시(近侍)로 대호군(大護軍)이 되었으며 우왕(禑王 : 1375~1388) 때 최영(崔瑩 : 1316~1388 東州人)의 막하에 들어가 서북면 도순문을 거쳐 밀직사(密直使)가 되고 1382년 밀직상의(密直商議)가 되었다. 1383년(우왕 9) 김화(金化) 전투에 참전하여 왜구와 싸웠으며 1388년 8월 추성좌리공신 봉익대부 밀직사사 상호군(推誠佐理功臣奉翊大夫密直司事上護軍)을 거쳐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가 되고 1390년(공양왕 1) 이성계를 해치려는 이초(李初) 윤이(尹彛)의 옥에 연루되어 안변(安邊)에 한때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1392년(공양왕 4)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에 오르고 문하평리 겸 응양위 상호군(門下評理兼鷹揚衛上護軍)으로 이해 7월 배극염(裵克廉 : 1325~1392 성주인으로 시중) 조준(趙浚 : 1346~1405 평양인으로 시중) 정도전(鄭道傳 : 1342~1398 봉화인으로 찬성사) 남은(南誾 : 1354~1398 의령인으로 동지밀직사사) 등 52명과 함께 이성계(李成桂)를 왕위에 추대 조선을 개국케 하여 순충분의좌명개국1등공신(純忠奮義佐命開國一等功臣) 참찬문하부사팔위상장군(叅贊門下府事八衛上將軍)으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하고 전 170결(田170結 : 1결은 현재 6,813평에 해당되므로 약 1,158,210평)과 노비 20구(奴婢 20名)을 하사(下賜) 받았다. 그 뒤 숭정대부(崇政大夫) 좌참찬(左參贊)에 오르고 동년 11월 태조왕(太祖王)이 내정에서 격구(擊毬 : 말을 타고 공을 치는 것)하였는데 팔위판사(八衛判事) 공(公)과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만수(柳蔓殊 : ? ~1398 문화인) 등이 참여하였으며 1394년(태조 3) 2월 태조왕께서 연복사(演福寺 : 경기도 개성시 연복동에 있는 절로 왕궁보다 큰 절)에 문수법회(文殊法會)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공(公)의 사제에 들르셨다가 수창궁(壽昌宮 : 고려 공민왕 때부터 궁궐로 사용되어 왔으며 이성계가 이곳에서 즉위식을 하였다)으로 거동하였다.

 

1395년(태조 4) 9월 개경 북안동(開京北安洞)에서 한양 창의문(漢陽彰義門 : 서울 종로구 창의동 자하문) 밖으로 이거(移居)하였으며 윤9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 현 서울시장으로 정2품 벼슬)에 부임되어 한양축성(漢陽築城)을 시작하여 완성을 보지 못하고 1396년 7월 12일 병으로 49세에 재임(在任) 시에 돌아가시니 임금께서 조회(朝會)를 정지하고 유사(有司)에 명(命)하여 예장(禮葬)토록 하였으며 뒤에 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판예조사 겸 첨의찬성 도평의사사(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判禮曹事兼僉議贊成都評議司事) 오위도총부도총관 계림부원군(五衛都摁府都摁管鷄林府院君)에 추증(追贈)되었다. 1407년(태종 7) 9월 한양 창의문(漢陽彰義門) 밖 공(公)의 사제를 태종(太宗)께서 매입하여 한 아들을 살게 하였으며 1812년(순조 12) 임금이 안성군수 박종경(安城郡守朴宗敬) 용인현령 한철유(龍仁縣令韓喆裕) 음죽현감 박창수(陰竹縣監朴昌壽) 영화찰방 박종산(迎華察訪朴宗山) 중림찰방 최종문(重林察訪崔宗文) 지제교 정조영(知製敎鄭祚榮) 등을 보내어 치제(致祭)토록 하였다. 시호는 양경(良景)이고 특시는 무열(武烈)이다. 부인은 정경부인(貞敬夫人) 서원염씨(西原廉氏)로 영문하부사 곡성부원군 염제신(廉悌臣 : 1304〜1382)의 딸이며 외조는 도첨의정승 예천부원군 안동(安東) 권한공(權漢功 : ? ~1349)이다.

 

계배(繼配)는 문하좌시중 영산부원군 영산(靈山) 신귀(辛貴)의 딸이며 외조는 찬성사 신천(信川) 강윤충(康允忠 : ? ~1359)이다. 공께서는 3남 3녀를 두시니 큰 아들은 증이조판서 길상(吉祥), 둘째 아들은 이조판서 문간공 효상(孝祥), 셋째 아들은 충청병사 설상(契祥)이며 사위는 중추원부사 우계 이만(羽溪李蔓), 장령 현풍 곽덕연(玄風郭德淵), 풍저창승 전주 최도일(全州崔道一)이며 외손녀 사위는 공소공 영순군 부(永順君溥 : 1444~1470 광평대군 아들)이다. 묘소(墓所)는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정동 산150번지이다.[경주정씨종친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