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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면 국사리 강감찬장군묘소(玉山面 國仕里 姜邯贊將軍墓所) 본문

통합청주시/흥덕구(興德區)

옥산면 국사리 강감찬장군묘소(玉山面 國仕里 姜邯贊將軍墓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0. 10. 21. 21:37

 

국사리에는 예전부터 유명한 장군의 묘가 있다는 이야기가 구전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금주(衿州) 강씨 후손들은 1963년 일대 묘지를 수소문하던 끝에 '姜邯贊'(강감찬) 이름이 쓰여진 묘지석을 발견하고 강감찬 묘로 삼았습니다. 묘지석이라 함은 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이나 묘소의 소재를 기록하여 무덤에 묻어 두는 돌을 말합니다.

 

옥산면 국사리 강감찬장군의묘(玉山面 國仕里 姜邯瓚將軍의墓) (tistory.com)

 

옥산면 국사리 강감찬장군의묘(玉山面 國仕里 姜邯瓚將軍의墓)

충현사옆에 위치한 강감찬장군의 묘와 묘 주위를 장식하고 있는 석조물이다 강감찬(姜邯贊, 948년~1031년) 귀주대첩의 승리를 이끈 고려 시대의 명장이며, 문신이다. 문종 때에 수태사 겸 중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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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박물관에 있는 함창인 김용대의 묘지석입니다.

문의문화재단지 장군석(文義文化財團地 將軍石) (tistory.com)

 

문의문화재단지 장군석(文義文化財團地 將軍石)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 강감찬장군묘가 있는 곳에서 발견된 것으로 일명 장군석이라고 불리우는 석상입니다. 혹자들은 강감찬장군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라고 이야기도 합니다. 강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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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후손들이 묘소의 지석(誌石)을 발견한 후 1964년 분묘를 만들고 1967년 비를 건립하였습니다. 묘역에는  상돌, 동자석,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과 강감찬장군 추모비가 있습니다.

후손들에 의하여 발견된 묘지석에 강감찬이라는 글씨가 많이 훼손되어 판독이 어려웠다고 합니다. 금주강씨 또는 금천강씨라고 합니다.

강감찬에 대한 모든것 - namu.wiki/w/%EA%B0%95%EA%B0%90%EC%B0%AC

 

각종 석물들의 모습입니다.

 

 본관은 금천(衿川). 어릴 때 이름은 은천(殷川).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궁진(弓珍)의 아들이다. 983년(성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임헌복시(任軒覆試)에서 갑과에 장원한 뒤 관직에 올라 승진을 거듭하여 예부시랑이 되었다. 그뒤 국자제주(國子祭酒)·한림학사·승지·중추원사·이부상서를 역임했고, 1018년 서경유수와 내사시랑평장사를 겸했다.

1010년(현종 1) 거란 성종(聖宗)이 (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고려를 침공하자, 고려 조정은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 통주(通州 :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에 나가 막게 했으나 크게 패배했다. 이에 놀란 조정의 대신들이 항복을 주장했으나, 강감찬은 이를 반대하고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여 왕을 나주로 피신하게 했다. 왕의 피신중에 양규(楊規)가 곽주(郭州)에서 적을 무찌르고, 하공진(河拱辰)의 외교적인 노력으로 화의가 성립되어 고려는 항복의 치욕을 면하게 되었다.

8년 후, 1018년 소배압(蕭排押)이 현종이 친히 조회(朝會)하지 않은 것과 강동(江東) 6성을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이때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곳곳에서 거란군을 격파했다. 침략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다.

강감찬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니 현종은 직접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오색비단으로 천막을 치고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였다. 이 자리에서 현종은 그의 손을 잡고 금화팔지(金花八枝)를 머리에 꽂아주는 등 극진한 환영을 했다. 거란군을 물리친 공으로 검교태위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1010년(현종 1) 거란 성종(聖宗)이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고려를 침공하자, 고려 조정은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 통주(通州 :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에 나가 막게 했으나 크게 패배했다. 이에 놀란 조정의 대신들이 항복을 주장했으나, 강감찬은 이를 반대하고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여 왕을 나주로 피신하게 했다. 왕의 피신중에 양규(楊規)가 곽주(郭州)에서 적을 무찌르고, 하공진(河拱辰)의 외교적인 노력으로 화의가 성립되어 고려는 항복의 치욕을 면하게 되었다.

8년 후, 1018년 소배압(蕭排押)이 현종이 친히 조회(朝會)하지 않은 것과 강동(江東) 6성을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이때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곳곳에서 거란군을 격파했다. 침략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다.

강감찬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니 현종은 직접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오색비단으로 천막을 치고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였다. 이 자리에서 현종은 그의 손을 잡고 금화팔지(金花八枝)를 머리에 꽂아주는 등 극진한 환영을 했다. 거란군을 물리친 공으로 검교태위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장명등의 모습입니다.

 

1020년 특진 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特進檢校太傅天水縣開國子食邑五百戶)에 봉해진 뒤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뒤 103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이듬해 덕종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검교태사 천수현개국후 식읍일천호(開府儀同三司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特進檢校太師天水縣開國侯食邑一千戶)에 봉해졌다.

죽은 후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현재 그의 묘소는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 樂道郊居集〉과 〈구선집 求善集〉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문종(文宗) 때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청주시가 통합되기전인 청원군 시절의 청원군지를 살펴보니 옥산면에 전해지는 강감찬의 전승되는 이야기가 있어서 옮겨본다.

 

강감찬 이야기 1
강감찬이 무정골에서 수락산을 벗 삼아 소요하고 있을 무렵, 이 곳에 벼락이 빈번했다. 마을 사람들은 걸핏하면 내리치는 벼락 때문에 항상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미장터에서 효행으로 이름난 어느 집 며느리가 우물에서 쌀을 씻
다가 쌀 톨을 몇 개 흘려보냈는데, 난데없이 벼락이 쳐 그 자리에서 참변을 당했다. 마을 사람들은 효부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이대로 가다가는 살아남을 길이 없다’면서 강감찬에게 호소했다. 이 같은 사실을 듣게 된 강감찬은 벼락이 필시 천도를 어기고 불법으로 횡행하는 것이라고 판단, 효부가 변을 당한 우물에 가서 소피를 보았다. 그러자 하늘에서 세 줄기 벼락이 쳤는데 강감찬이 두 개의 벼락을 잡아 반 토막으로 꺾어 버렸다. 그 후부터 걸핏하면 내리치던 벼락이 줄어들었다. 이 곳이 바로 오늘날 ‘광촌’이다.
- 청원군 옥산면 전승, 󰡔청원군 전설지󰡕(2002).

 

 강감찬 이야기 2
강감찬이 관직에서 물러나 강산을 유람할 때, 병천장터를 지나다 우연히 주막에서 한 농부를 만나게 되었다. 농부는 동림산 밑의 상동림에 살고 있었는데 강감찬을 만나자마자 고을 자랑을 늘어놓았다. 강감찬은 농부의 말에 호기심도 생기고 그 곳의 기상을 살펴보고 싶은 마음에 농부가 산다는 상동림으로 들어와 조그마한 초당을 짓고 휴양을 하게 되었다.이듬해 여름, 농부가 초당으로 강감찬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 곳 초당에서 모기 한마리를 볼 수 없었다. 동림산은 원래 모기가 극성인 곳인데 말이다. 농부가 의아해 하며 이 사실을 말하자, 강감찬은 창호지에 부적 한 장을 써주며 이것을 모기가 가장 많이 들끓는 계곡에 던지라고 했다. 농부가 그대로 따랐더니 모기들이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부적에는 ‘姜․邯․贊’이란 이름 석 자만 적혀 있었다. 부적으로 모기를 몰아 낸 그 계곡을 ‘무문골’이라 하여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청원군 옥산면 전승, 󰡔청원군 전설지󰡕(2002).

 

 강감찬 이야기 3
동림산에서 산수를 벗삼아 지내던 강감찬은 수락골과 무정골을 안고 있는 수락산의 승경을 좋아해서 이 곳으로 옮기고 삼 년을 지내게 되었다. 그 해 칠월, 글을 읽으려니 가까운 논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너무 심하여 글을 읽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밤마다 되풀이되는 소리는 이제 소란스럽기만 했다. 이에 강감찬은 논가에 나가 하늘을 향해 ‘삼일격성(三日激聲)’이라 쓰고 돌아오니, 그 날부터 개구리 소리가 사흘에 한 번씩 들려왔다. 이로써 이 고을 이름을 ‘무정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청원군 옥산면 전승, 󰡔청원군 전설지󰡕(2002).

 

강감찬 이야기 4
강감찬이 상동림의 초당에서 가을의 풍광을 즐기고 있을 때, 갑자기 북소리가 들려왔다. 강감찬은 노복 억쇠에게,
“저 소리가 어디에서 나는 소리냐?”고 물었다.억쇠는,“무슨 소리 말씀입니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강감찬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있더니, 노복에게 “장정 열 명을 고개머리로 데리고 가서 숲속에 숨은 괴한 두 명을 잡아오너라!”며 명했다.영문을 모르는 소리였다.  이에 억쇠는 장정들과 함께 고개머리로 가보았다. 과연 두 명의 괴한이 숨어 있었다. 소배압의 명을 받고 강감찬을 죽이러 온 자들이었다. 이 때부터 이 곳을 북소리가 들려온 곳이라고 하여 ‘자명골(自鳴-)’이라고 부르고 있다. - 청원군 옥산면 전승, 󰡔청원군 전설지󰡕(2002).

 

강감찬 장군의 추모비입니다.인헌공울정강감찬장군추모비라고 적혀있습니다
무덤은 호석을 두르고 있습니다.
옆에 위치한 사당인 충현사의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