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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면 선암리 주왕사(北二面 仙岩里 駐王祠) 본문

통합청주시/청원구(淸原區)

북이면 선암리 주왕사(北二面 仙岩里 駐王祠)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1. 2. 25. 18:33

 

청원구 북이면 선암리 166-2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풍천임씨감역공파사당(豊川任氏監役公派祠堂)인 주왕사(駐王祠)입니다. 근간에 지어진 사당으로 적벽돌로 담을 둘렀으며 사당과 함께 관리동을 갖추고 있습니다.동네의 이름이 주왕리입니다.주왕(駐王)이란 임금의 말이 머무렀던 곳이라는 뜻일게다

 

사당은 후손들에 의하여 잘관리되고 있습니다

 

풍천임씨의 시조 임 온(任溫)은 고려 때 경상도 추동 안찰사를 거쳐 어사대부, 감문위 대장군을 지냈다. 그 뒤 6세손 임 주(任澍)에 이르기까지 황해도 풍천에 살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풍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본관 풍천은 황해남도 송화군의 옛 지명이다. 고려 초에 풍주(豊州)로 이름을 바꾸었다. 1413년(태종 13) 군현제 개편 때 은율(殷栗)을 합병하여 풍율군(豊栗郡)이라 하였다가 곧 분리하였다. 1469년(예종 1) 왕비 안순왕후 한씨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풍천도호부(豊川都護府)로 승격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6년 황해도 풍천군이 되었으나 1909년 풍천군을 폐지하여 송화군(松禾郡)에 합병했다. 1967년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때 대부분의 옛 풍천도호부 지역이 황해남도 과일군으로 분리 개편되었다.

 

논가운데 시멘으로 옹벽을 쳐서 주왕사를 건축하였다

 

고려 충렬왕 때 장군까지 오른 임주의 역할로 문중의 인물들이 정치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임주는 자송과 자순을 두었는데, 임자송은 조적의 난을 물리치며 공을 세우고, 자순은 개성부사를 역임하며 가문을 일으키는 발판을 마련한다. 시와 문장이 뛰어난 임원준은 당대의 명관으로 명성을 얻었다. 또 그의 아들 사홍은 한어와 해서에 뛰어났고, 사홍의 아들 광재와 숭재는 조선의 예종과 성종의 부마가 되었다. 임자순의 직계 후손인 임유겸은 중종 때 서울 시장 격인 한성부 판윤을 거쳐 판서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3형제는 모두 정계에 진출해 호조참판과 예조판서, 홍문관 박사를 지내는 등 형제가 모두 출중했다고 한다.

학자 가문으로 청렴을 내세우며 명문가로 자리매김하던 문중은 연산군때 어처구니 없는 사건으로 풍랑을 맞는다. 발단은 연산군이 연회를 베풀 때 마침 벽에 임희재의 시 한편이 걸려 있었는데, 백성을 괴롭히는 진시황의 폭정을 비방한 구절을 두고 연산군을 빗대어 비방했음이 발각되어 문중이 고초를 겪는다.

그런가 하면 문중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로 임응규를 들 수 있다. 이름보다는 사명대사로 더 유명한 그는 형조판서 임수성의 둘째 아들이다. 서산대사의 제자이기도 한 그는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승복을 벗고 의병장으로 나서 구국의 의지를 불태운다. 사명대사는 일본에 인질로 잡혀간 동포를 구하기 위해 왜장과 담판을 벌여 3500명을 구출하는 등 두둑한 배짱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 보기드물게 조선의 여류학자 윤지당 임씨는 총명하고 학문이 깊었다. 어릴적부터 총명해 훗날 성리학에 통달, 학문을 연구한 글을 그가 죽은 뒤 '윤지당유고'로 묶어 간행했다.

고종이 정려를 내린 임기백은 주왕리 마을에 세워진 효자각의 주인공이다. 그는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산에서 약초를 캐고, 물고기를 낚았으며, 15세 때는 아버지의 목숨이 위독하자 단지로 부친을 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시묘살이로 몸이 쇠약해져 병들어 죽자, 고종이 효행을 기리기 위해 정려를 명하고 효자각을 세웠다. 근세 인물로는 명필가 임수적과 그의 아들 임정은 시가에 통달하고 글쓰기에도 능해 실력을 인정받았고, 또 주기설을 확립한 임정주는 후세까지도 명성이 이어지고 있다. [카페-양평소풍참조]

 

풍천임씨 가문의 충신과 열녀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임기백의 효자문이 있습니다

 

주왕리와는 광해군 때 참판 벼슬을 지낸 임지후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자리에서 내몰리고 숨어지내야 하면서 인연을 갖게 된다. 당시 아버지의 외가인 청주 한씨의 도움으로 정치적 변두리에 터를 잡게 되는데, 바로 그곳이 주왕리이다. 정치적 피해자인 임지후는 후손들에게 절대 벼슬길에 오르지 말 것을 당부함으로써 후손들은 정치가보다는 학자들이 많다.

몇 년 전 만해도 20여호 씨족들이 뭉쳐 살았다는 주왕리는 지금은 세거지가 불분명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외지로 떠나고 없다. 다만 유적으로만 문중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왕이 머물렀다는 자부심을 보여주듯 임씨 문중의 사당인 주왕사를 알리는 비석이 나온다. 그리고 초정을 가기 위해 세종이 넘던 고개에는 3명의 문중 효인을 기리는 정려각이 나란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정려각 앞으로는 사당인 주왕사를 지어 해마다 10월 1일 시제를 지내고 있다.

전형적인 농촌 풍광이 가득한 주왕리. 마을을 중심으로 주위로의 지명을 살펴보면 집현전 학자들이 왕과함께 동행하여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서당골,왕과 왕비가 휴식을 취했다고 전해지는 신선바위,초정쪽으로 말을 타고 넘었다는 마령(馬嶺)고개, 왕을 호위하는 경계초소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망령(望嶺)고개, 네명의 장수가 행궁을 호위하였다고 전해지는 사장(四將)터, 또한 선암2구에는 세종임금이 들렸다고 하여 궁성 또는 황방(皇訪)골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으며 임금을 따라 수행하던 관료들의 식자재인 소금을 보관하던 곳이라 하여 염(鹽)티라는 지명도 존재한다. 초정원탕에서 호명리 남쪽으로 가는 곳에는 대궐(大闕)내미라는 고개가 있는 등 이 곳에는 행궁과 관련된 자연지명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행궁터를 찾기위한 많은 학술세미나등이 열리고 있지만 아직도 완전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그래도 지금의 선암리가 가장 근접하는 많은 지명과 더불어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음은 인정해야 할것이다.

 

 

마을입구에 있던 주왕사비석을 사당앞으로 옮겨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