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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읍 갈평리 이강년선생기념비(聞慶邑 葛坪里 李康䄵 先生紀念碑) 본문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인(樂仁, 樂寅), 호는 운강(雲岡). 아버지는 기태(起台)이다.
대대로 벼슬을 하지 않던 집안에서 태어나 1880년(고종 17)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행용양위부사과(折衝將軍行龍驤衛副司果)로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895년 8월 민비가 일본군에 의해 학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월 11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순검 이호윤(李浩允), 김인담(金仁覃) 등 3명을 체포하여 농암장터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효수(梟首)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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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제천의 유인석(柳麟錫)을 찾아가 사제(師弟)의 의를 맺고, 유인석 의병부대의 유격장으로서 문경·평천·조령 등지에서 활약했다. 이해 4월에 장기렴(張基濂)이 거느린 관군과 제천에서 싸워 패한 후, 강원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랴오둥[遼東]으로 가고자 했으나 영월에서 더 전진하지 못하고 소백산에 들어가 7월에 의병을 해산했다. 유인석이 랴오둥으로 가자 그도 잠시 랴오둥으로 건너갔다가 돌아와서 단양 금채동(金采洞)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1907년 일본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되어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물러나고 한일신협약으로 한국군대가 해산당하자, 영춘(永春)에서 더 큰 규모의 의병부대를 일으켰다.
1907년 7월 7일 제천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것을 비롯하여, 9월 16일에는 싸릿재, 9월 27일에는 죽령, 10월 5일에는 단양 고리평(故里坪), 10월 23일에는 풍기 백자동(柏子洞)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때 강원도의 이인영(李麟榮) 의병부대 및 경기도의 허위(許蔿)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풍기·문경·단양·연풍·영월·죽령 일대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했다.
이후 이인영으로부터 경기도로 집결하라는 통문을 받고 경기도 건천(乾川)으로 진출했다. 1908년 7월까지 충청도·강원도·경기도 일대에서 약 500명을 이끌고 치열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07년 11월 경기도 양주에 모인 의병장들이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鎭所)를 성립시키고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 이인영을 13도창의총대장으로 추대하고 각 도별로 진명을 내리고 지휘체계를 정비할 때,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으로 임명되었다(13도 창의군). 이후 13도연합의병부대가 해체된 다음 1908년 2월 17일의 경기도의 용소동(龍沼洞)전투를 비롯하여 2월 26일의 갈기동(葛基洞)전투, 3월 12일의 백담사(百潭寺)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올리는 등 강원도 인제 부근에서 일본군의 포위 공격망을 돌파·항전하면서, 1908년 4월경에는 소백산·일월산 일대로 활동무대를 옮겨와 일본군과 항전을 계속했다.
이때 변학기(邊鶴基)·성익현(成益顯)·김상태(金尙台)·정경태(鄭敬泰)·백남규(白南奎)·정연철(鄭蓮哲) 등 의병장과 제휴하여 안동 서벽(西壁)전투에서 일군을 맞아 매복작전으로 크게 승리하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다. 소백산·일월산 일대에서의 활약으로 일본군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고 큰 전과를 거두었으나, 청풍(淸風)·작성(鵲城) 싸움에서 부상을 입고 1908년 6월 4일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되었다. 같은 해 7월 8일에 서울의 일본군 헌병사령부로 압송되었다가 평리원으로 옮겨 9월 22일에 교수형을 선고받고 10월 13일 처형되었다.
시신은 유언에 따라 과천의 효령대군의 묘 아래 장례했다가 나중에 제천으로 옮긴 듯하다. 저서로는 〈운강문집〉·〈운강선생창의일록〉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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