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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읍 교동리 오윤묵송덕비(沃川邑 校洞里 吳允黙松德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옥천읍 교동리 오윤묵송덕비(沃川邑 校洞里 吳允黙松德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1. 10. 11. 14:53

옥천읍 교동리 비석거리에 있는 일제강점기때 도평의원을 지낸 오윤묵의 송덕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도평의원오윤묵송덕비(道評議員吳允黙頌德碑)라고 적혀있습니다.

 

오윤묵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는 않았으나 지역 유력자로 일제의 통치에 부응하거나 도움을 주고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오윤묵의 행적과 관련해서 지역에 크고 작은 일에 관여하고 옥천군 내 각종 공사 현장 등에 지원을 한 기록이 보인다. 1911년 7월 수해로 구읍 실개천 제방이 무너지자 318원 을 내서 제방 공사를 하도록 했고, 옥천읍내 교량 개설비로 51원을 부담했다. 이와 함께 1917년 8월 대홍수가 나서 옥천 일원을 휩쓸었는데, 이해 10월 20일 옥천교 개통식에 ‘읍내 부자 오윤묵 씨의 집안 삼부자’가 참석했다는 기사가 실린 것으로 보아 옥천교 개통 에 어떤 식의 도움을 주었던 것이 아니면, 오윤묵이 당시 옥천 사회에서 누리고 있던 지위 를 가늠하게 해준다.

 

 

‘道評議員 吳允默 頌德碑’ (도평의원 오윤묵 송덕비)라고 쓰여 있습니다.

散萬金財(산만금재) 鮮衆民嗷(선중민오) : 만금의 재산을 헐어, 백성의 근심을 덜었다.

值歉施悳(치겸시덕) 咸頌齊口(함송제구) : 흉년이 들면 덕을 베풀어 모두가 입을 모아 칭송한다.

 

그렇다면 오윤묵은 어떤 사람일까요? 국사편찬위원회가 제공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하면 1878년 태어난 인물로 대한제국의 관원이라고 나옵니다.1925년 4월 1일 발행된 개벽제58호 ‘충북답사기’에서 차상찬 씨가 오윤묵씨를 언급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유독 옥천은 타지방의 부호들이 반대로 모혀든다. 현재에 옥천의 수부안이 충북의 거부라 가위 할 오윤묵君도 경성에서 이래하얏고 (오씨는 원 함경도인으로 이용익 시대에 졸부가 되얏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1908년 발행된 서북학회 월보 제3호에 실린 회원명단에도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서북학회는 함경도 출신인사들이 모여 결성한 단체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윤묵씨가 일제강점기 시절 맡았던 관직은 ‘도평의원’입니다. 일제는 1920년 7월 29일자로 조선도지방비령을 공포합니다. 그러면서 도지사의 자문기구로 도평의회를 구성합니다. 의장은 도지사가 맡고 관선과 선출직 평의원으로 구성됩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충북지부에 따르면 오윤묵은 1927년 제3대 관선 도평의원에 오릅니다. 관선도의원에는 충북의 대표적인 친일인사였던 민영은과 방인혁과 일본인 3명으로 돼 있습니다. 민영은은 청주갑부로 일제에 비행기(애국호)를 헌납하는데 앞장섰던 친일인사입니다. 장달수의 한국학카페에 따르면 오윤묵이 국어강습회를 연 사실을 소개합니다. 이에 따르면 충북 옥천군 읍내면 오윤묵은 자기집에 사립학교와 국어야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운영비를 자(부)담하는 한편 박창화를 교사로 고빙한 후 청소년을 대상으로 일본어를 가르쳤습니다.(이에 대한 근거로 매일신보 1912년 1월 13일 ‘충북의 독지가’란 기사를 언급합니다) 국어야학교인데 한글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일본어를 가르쳤다고 하니 이 부분도 생각해볼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