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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성면 도장리 육한묘지(靑城面 道場里 陸閑墓地) 본문
청성면 마장리에 있는 옥천인 육한의 묘지입니다. 육한은 제주목사를 지냈으며 옥천과 관성은 같은 지역이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관성은 옥천沃川의 별칭이 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육씨陸氏는 중국에서 시작된 성씨라고 전해진다. 『옥천육씨대 동보沃川陸氏大同譜』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에서 8학사의 일원 으로 신라에 파견된 육보陸普가 당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자리를 잡고 살게 된 것에서 옥천 육씨가 비롯된다. 육보는 절강성淅江省 소흥부紹興府 사람으로 당선공唐宣公 육지陸贄의 후손 이다.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 당나라 명종이 신라에 유교를 전파하기 위해 파견한 8학사의 일원 중 문장과 공적이 뛰어나 경순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세보를 보면, 육보는 경 순왕의 총애를 받아 부마가 되고 관성군管城君에 봉해졌다. 관성은 옥천의 옛 지명이다. 이 후 육보의 후손들이 옥천에 정착하여 관성을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육보는 신라가 망 하자 옥천군 안내면 인포리仁浦里에 은거하면서 매일 산에 올라가 신라의 부흥을 축원하다 가 숨졌다고 한다. 이러한 육보의 명망 높은 학문적 바탕을 이어받아 육씨는 고려와 조 선조에 이르도록 많은 문인과 학자를 배출하였다고 하며, 특히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는 의병을 일으켜 충의를 실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의 중간 세계世系에 대한 기록이 없어 고려 충렬왕 때 주부主簿를 지낸 육인 단陸仁端을 1세조로 하여 이어오고 있다.
세계에 의하면, 시조인 육보의 후손 인단-희가希價-거원巨遠으로 이어진다. 육인단의 증 손이자 3세世 육거원陸巨遠의 아들 5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4파를 이루었다. 다섯째 육태귀 陸台貴는 공양왕 때 1품 벼슬에 올랐으나, 자손이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육거원의 맏아들 육려는 덕곡공파德谷公派, 둘째 육항은 목사공파牧使公派, 셋째 육비는 순찰사공파巡察使公派, 넷째 육수는 낭장공파郎將公派로 갈라졌다.
육려는 고려 공양왕 때 도순찰사都巡察使를 지냈으며, 이성계와 더불어 무장으로서 명성이 자자하였다. 고려 말에 왜적을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워 경주에 그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고려 말에 불교의 폐해를 알리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후에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뒤 벼슬을 내리고자 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을 내세워 벼슬을 사양하고 충남 공 주에 은거하다가 생을 마쳤다. 후에 전북 장수長水의 압계사鴨溪祠에 배향되어 후인들이 추모하고 있다. 육려의 손자 육명산은 대장군에 이르렀고 석동石同은 회령판관을 지냈다. 묘소는 충남 공주군 산내면 성월리에 있다.
2남인 육항은 통훈대부 판공주목사를 지냈다. 육항의 맏아들 육진의 후손에는 부위를 지낸 육저와 제주목사 육한, 동래현감 육세영, 조선 정조 때 유학자 육상지 등이 있다. 이 중 조선 성종 때 제주목사를 지낸 육한은 옥천군 청성면 마장리로 낙향하면서 제주도 조랑말을 가져와 길렀다. 이때부터 이 마을은 마장리馬場里라고 불린다. 옥천군 청성면 마장리 문수산 아래에 묘소가 설단되어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10일 마장리 재실에서 목사공 시향을 지낸다. 목사공파의 후손 중 정조 때 학문과 도학으로 명성이 높았던 육상지陸相贄 는 벼슬을 하지 않고 고향에 은거하며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3남인 육비는 순찰사, 봉상대부, 전공총낭 등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경북 상주시 중산면 송산촌 후산에 있고, 상계 선대 묘소와 후손들 일부가 충남 금산에서 세거하고 있다. 육비의 아들 육애는 참판을 지냈으며, 육애의 아들 대에서 두 파로 갈라졌다.
4남인 육수는 낭장 벼슬을 지냈다. 후대 인물로는 명종 때 장사랑을 지낸 육한종과 선조 때 통정대부를 역임한 육붕이 있다. 숙종 때 학자 육홍은 문장과 덕행으로 이름을 날렸다. 낭장공파는 매년 음력 10월 15일 충북 옥천군 안내면 동대리 재실에서 시향을 지낸다. 옥천육씨의 인구는 육씨 총인구 대비 95.7%인 4,341가구에 1만 8,027명이다. 주요 세거지는 전북 장수군 산서면 원흥리, 전북 장수군 상서면 마하리, 충남 금산군 제원면 용화리, 옥천군 청성면 능월리와 마장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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