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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면 금암3리 마을자랑비(東二面 金岩3里 마을자랑비) 본문

전설따라 삼천리/마을표지석

동이면 금암3리 마을자랑비(東二面 金岩3里 마을자랑비)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1. 10. 30. 08:02

 

금암3리는 용암마을이라고 불리우는 고창오씨들의 집성촌입니다.

 

금암리는 군동면(郡東面) 용암리(龍岩里)라 불리던 마을이며, 1739년 기록에는 군동면 용암리에 47호가 살았고 1891년 신묘장적(辛卯帳籍)기록에는 55호에서 15세 이상 255명이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금암리 유래는 마을 뒤에 용암사란 절이 있고 큰 바위들이 용같이 뻗었다 하여 용암말 이라 불렸고 옆마을이 목시, 목쇠인데 목쇠는 목금(木金)으로 목금의 금(金)자와 용암의 암(岩)자를 따서 두 마을의 뒷글자를 합쳐서 금암리가 되었다.

금암리에는 충청북도문화재인 1545년 송정 전팽령이 건립한 양신정(養神亭)과 1765년 유림들에 의해 세워진 목담서원이 있다. 목담서원(鶩潭書院)과 목담서원에 모셔진 사서공 전식 선생의 영정, 명종 때 효자를 기리기 위한 효자정과 효자비, 그리고 그 효행을 뒷받침 하는 호천(虎泉) 등이 있다.

임진란 때 중봉 조헌선생을 도운 인봉 전승업선생 개전초기에 중봉선생을 의병장으로 추대 의병 100명과 군수품을 모아 보은 차령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금산전투 후 연곤평에서 순절한 의병과 승병 1,000여명의 시신을 모아 오늘의 칠백의총을 만들고 중봉선생 유족을 돌보았다.

자연마을로는 압구정, 등나무마을, 새말, 솔밭말, 건너말, 용암말, 안골말, 황새골, 옥고대, 말참묵이가 있고 건너말은 빈집만 남아 있다. 용암말에 오필렬효자문과 청주한씨(淸州韓氏)효부비가 있다.

압구정은 고창오씨(高敞吳氏)가 입향조인 공조참의 오천(吳泉)공이 세종 16년(1434년)에 이곳에 터를 잡은 이래 20여대를 이어 살고 있다. 1978년 취락구조사업으로 적하리 분지벌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금암리로 집단이주 창앞마을을 이루었다.

압구정 뒤에 서당골이 있고 앞에는 갯들, 나마터, 씨드물, 돌가티, 부단지골, 막은골, 줄골이 있고 새마을 앞에서부터 대정목, 모새골, 샘골 그 앞에 새골이, 바위틈새골, 봇들, 못안이 있고, 둥구나무 마을 앞에 방아다리, 용암말 주변에 장나무골, 부흥산, 가는골, 서당골, 턱갈메기, 산지당, 탑선골, 당수말, 말래, 홍고개, 삼거리, 증갱이, 못안이 있다.

말참묵(말차목)이 앞에 수우골, 긴다랭이골, 탑송골, 부차골이 있다. 새말 주변에 줄골, 갯들, 강당, 봇들, 못안골, 찰방재, 새골, 샘골, 동자말, 새말 앞들이 있고 황새골, 못안, 섬말, 골말, 장수마루, 수골, 새터말, 뒷골, 삼거리, 찰방재가 있다.

 

오래된 마을표지석이 더 정겹습니다.

 

이 고장 출신의 오수택의 송덕비입니다.
4H비석도 어깨를 나람히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