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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원면 옥화리 만경정(米院面 玉花里 萬景亭)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미원면 옥화리 만경정(米院面 玉花里 萬景亭)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1. 11. 21. 19:43

 

1989년에 건립하였으며 조선 연산군대(1494~1506)에 사헌부 집의 민돈암(晩遯庵) 윤사석이 세운 파평윤씨 정자로 1926년 허물어져 1989년에 재건하였다. 지금의 정자는 1989년에 재건한 건물로 정면2칸 측면1칸 겹처마 팔작지붕에 양회바닥이며 안에는 1989년에 윤지한이 지은 "만경정중수기"를 걸었으며 밖에는 "만경정"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그리고 정자앞에 1989년에 윤지한이 지은 "만경정중건기비"를 세웠다. 지붕에서 누수가 있는지 천막을 덮어 놓았다. 보수가 필요하다.

 

윤사석은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호는 둔암(遯菴)이다.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玉花里)에 은거하였다. 성종 때 사헌부집의를 지냈으나 연산군 때 거듭되는 사화로 현인군자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 가족들과 함께 미원으로 내려와 옥화대 위에 만경정(萬景亭)을 짓고 은거하였다. 이이(李珥)는 ‘그가 평소에 저술한 것들을 은둔생활 중에 모두 불살라버려 후세에 전하는 것이 없으니 애석한 일’이라고 하였다.《동문선》에 그의 시 한 수가 전하며, 용궁(龍宮)의 죽락사(竹樂祠)에 옥화리 숭현사에 배향되었다.

 

2019년 7월에 찍은사진입니다.

 

<萬景亭重修記>
淸原之東南 玄川之左右 亭樓臺閣 星羅碁置 賁飾江山之勝 豈徒爲景物哉 盖因祖先之 有偉蹟 而後孫之寓追慕者也 卽我先祖晩遯庵先生之亭 亦其一也 先生以圭璧之資 淵奧之學 當李朝成宗時 官司憲府執義 陳治亂之道 至燕山失政 累徵不就 破帽裂衫 絶意世途 匹馬南行 歸隱于淸原之玉華臺 築亭於臺上 爲晩年藏修之所 而歲久頹圮 奧在丁巳 重建 于此 其制度雖無壯麗金碧之侈 棟宇維新 楣扁仍舊 而水回山亭 其地幽責見 非但爲雲仍羹墻寓慕之所 亦可供騷人墨客登臨之勝矣 逮至丙寅 豪雨漏瓦傾柱 頗有難保之狀 凡有 追遠之誠者 安得不慨然于中乎 吾族叔重鉉 用是懼先蹟之湮沒無據 迺與敬慕齋宗會長亨 根 合謀諸宗 圖所以重修之計 正其傾歪 而補其滲漏 經始未幾月 工役告訖 僉長老 責芝 漢 以記其事 顧此無文 不足以揄揚輪奐之美 而窃有所感焉 則敬爲之 言曰 府君之德學風節 已有諸先輩之大筆 玆不敢贅然 吾族之居于龍淸公者 千有餘戶 而歷年已四百矣 不以科甲烜赫 而能以詩禮 傳承保守儒業者 莫非府君之遺蔭餘澤 則慕先之道 不亶在於亭宇而在於繼述其志事矣 故自此而爲府君之後者 善繼善述 乃塗乃墍 以今日之心爲心 則斯亭之屹然 永存於淸玄之間者 可執契而斯矣 不亦媺乎 故敬書以自勉 且奉諗于族中之老 少云爾
西紀 一九八九年 三月 上澣 十八世孫 芝漢 謹記
【번역문】
청원의 동남쪽 현천(玄川)의 좌우로 누정과 대각이 별처럼 늘어서고 바둑돌처럼 자리하여 강산의 형승을 더해주고 있으니, 어찌 단지 볼만한 경치일 뿐이겠는가? 대저 선조의 뛰어난 자취가 있고서 후손이 추모함을 더하는 것이니, 곧 우리 선조인 만둔암(晩遯庵) 선생의 정자도 또한 그 하나이다. 선생은 규벽 같은 자질과 심오한 학문으로 조선 성종 때 벼슬이 사헌부 집의에 이르렀으며, 임금께 치란(治亂)의 도(道)를 진설하시었다. 연산군의 실정(失政)에 이르러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 나아가지 않고 관모와 관복을 찢어버리고 벼슬에 대한 뜻을 끊은 채, 필마로 남쪽으로 내려와 청원의 옥화대(玉華臺)에 은거하시며 절벽 위에 정자를 지으시고 만년에 거처하시며 학문하실 곳으로 삼으셨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정자가 무너져, 지난 정사년 이 곳에 중건하였다. 그 제도가 비록 장려하거나 고운 색채의 화려함은 없을지라도 동우(棟宇)는 더욱 새롭고 미편(楣扁)은 예스럽다. 물줄기가 산정(山亭)을 휘돌고 그 터가 그윽하니 단지 자손들이 추념하여 숭모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시인 묵객이 올라 감상하는 형승지로도 족하다. 병인년에 이르러 호우로 기와가 새고 기둥이 기울어 자못 유지 
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하였다. 무릇 먼 조상을 잘 받드는 정성이 있는 자 어찌 마음에 개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의 족숙인 중현(重鉉)이 선조의 유적이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을 염려하여 곧 경모재종회장인 형근(亨根)과 더불어 여러 집안 어른들과 상의하여 중수할 계획을 도모하였다. 그 기울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그 새는 것을 보수하니 일을 시작한 지 몇 달이 못 되어 공사를 끝낼 수 있었다. 여러 장로들이 나 에게 그 일을 적을 것을 맡기었다. 이 일을 돌아보건대 글이 없다면 윤환의 아름다움을 드날릴 수 없으니, 곧 느끼는 바가 있어 삼가 그 일을 적는다. 내가 말하니, 선생의 학덕과 풍절은 이미 여러 선배들의 대필(大筆)이 있으니 이에 감히 쓸데없이 덧붙이지 못하겠다. 우리 집안의 용궁, 청원, 공주에 사는 자가 천 호요 그 역사가 이미 400여 년이라. 과거에 합격하여 빛내는 것이 아니라 시례(詩禮)로 유업을 전승하고 보수하는 것은 선생의 음덕과 은택이 아닌 것이 없으니, 곧 선조를 숭모하는 길은 다만 정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뜻과 사적을 계술함에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로부터 선생의 후손된 자 잘 계승하고 보수하여 오늘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곧 이정자는 우뚝히 청원과 현천 사이에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은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니, 또한 아름답지 않겠는가? 이에 삼가 글을 지어 스스로 권면하면서 또한 집안의 노소에게 부탁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