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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원면 미원리 쌀안장터만세운동기념비(米院面 米院里 쌀안장터萬歲運動紀念碑)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미원면 미원리 쌀안장터만세운동기념비(米院面 米院里 쌀안장터萬歲運動紀念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2. 10. 11. 14:24

 

 

미원면 미원리 약물내기에 세워진 쌀안장터만세운동기념비입니다. 주위로 공원도 조성되어 있고 여러가지 주민 편의시설도 갖추어져 있습니다.

 

 

1919년 3월1일 독립선언서를 반포하고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만세운동이 삼천리 강산을 진동했다. 이에 충절의 고장인 청주지방에서도 혹은 장터에 모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혹은 산위에 모여 봉화를 높이들고 독립만세를 외쳤으니 그중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독립쟁취의 민족기운을 보여준곳이 바로 이곳 쌀안장터이다. 돌이켜 보건데 쌀안은 충절의 맥을 지켜온 전통의 고장으로 일찌기 강제해산 된 청주진위대가 일병과 접전후 항일의병활동의 중심무대가 되었던 곳이며 민족대표 33인중에서 손병희선생이 이웃 북이면 태생이며 신석구 선생이 금관리에서 권병덕 선생이 종암리에서 성장했으니  일찍부터 민족정기가 살아 숨쉬던 곳이다. 쌀안 만세운동의 대략은 이러하다.온나라에 불붙은 만세운동의 기운과 인근 청주등지의 영향도 있어 뜻있는 이들은 대대적인 시위를 계획하여 3월 30일 장날을 거사일로 택하고 오후 2시경 네거리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동참을 호소하니 일천여명의 주민과 장꾼들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열에 합류하여 아래장터 윗장터가 순식간에 독립만세의 함성으로 가득찼다. 일본헌병이 출동하여 해산시키려고 하였으나 만세의 함성은 더욱 거세졌으니 세가 불리함을 느낀 일병은 주동자 한사람을 체포하였다. 그러자 시위대는 일병 주재소로 몰려가 석방을 요구했고 일병은 청주로 응원병력의 급파를 요청하는 한편 총을 겨누어 위협했다. 이에 투석으로 맞서 대항하던 시위군중들은 일병주재소의 정문기둥을 넘어트리고 담장마저 허물어 버리니 당황한 일병은 드디어 실탄사격의 만행을 저질러 장일환과 이병선이 사망하고 정무섭은 한팔이 잘려나갔다.그러나 시위대는 기세가 꺽이지 않고 더욱 격렬히 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청주로 부터 응원군이 도착한 후에 강제해산 되고야 말았다.일병이 미리 파악하였던 주동자를 현장에서 거의 구금하고 피신자도 체포되었다. 다음날에는 이 소식을 들은 낭성면 주민들까지 합세하여 수백명이 다시 시위를 계속하였고 또 4월1일에는 괴산시위에 참가하고 돌아오던 천주교도 수백인이 산위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으니 과연 쌀안만세운동은 충절의 기상을 크게 발휘한 쾌거라 하겠다. 만세운동의 주동인물로 실형선고를 받아 복역한 이는 다음과 같다.

 

쌍이리 이수란, 내산리 윤인보, 용곡리 신경구, 종암리 이용실, 화원리 성규원, 미원리 김진환, 대신리 신정직,  미원리 서정열, 성대리 오교선, 화원리 최봉원, 종암리 이성호, 보은면 이서구, 낭성면 신성휴, 낭성면 신학구.이다.

 

분연히 일어나 맨주먹으로 일제에 항거하던 넋들은 고인이 되었으나 후손들이 그 터전을 지키며 살고있으니 그날의 고귀한 정신이 조국광복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누구라도 가슴깊이 새겨두고 어찌 잠시라도 잊을 것인가. 광복50주년의 뜻깊은 해에 미원면은 뜻을 모아 그 날의 모습을 빗돌에 새겨 길이 후세에 귀감으로 삼는다. 서기1995년2월 일 충북대학교 문학박사 임동철 짓고청원문화원장 오윤환 쓰다.만세운동 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