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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면 송동리 장연노씨효열각(七星面 松洞里 長淵盧氏孝烈閣)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칠성면 송동리 장연노씨효열각(七星面 松洞里 長淵盧氏孝烈閣)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3. 10. 3. 12:44

송동리(松洞里)는 본래 괴산군 동상면의 지역으로 골짜기에 속해 있으므로 솔골, 또는 송동(松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廢合)에 따라 갈곡(葛谷)과 서원리(書院里)를 병합(倂合)하여 송동리(松洞里)라 해서 칠성면(七星面) 편입(編入)되었다.

 

송동리 마을초입의 작은 야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장연노씨의 효열각입니다. 몇 번이고 발걸음을 한곳이지만 올 때 마다 왠지 낮이 설은 느낌입니다.

 

남양홍공수정부인열녀장연노씨지비(南陽洪公壽鼎夫人㤠女長淵盧氏之碑)라고 쓰인 비석이 발길을 먼저 반긴다. 남양인 홍수정의 부인인 장연노씨의 열행기록을 각자하여 놓았습니다. 비석은 1984년에 후손들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막돌과 흙을 켜켜히 쌓아 둘렀다.

 

 

열녀각 안에는 “烈女學生洪壽鼎妻孺人長延盧氏之門”(열녀학생홍수정처유인장연노씨지문)이란 편액이 걸려 있고,
 “烈女長延盧氏爲夫割股之豆石”(열녀장연노씨위부할고지두석)이라 새겨진 암석이 있다.건물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며 일각대문에 담장을 둘렀는데 정려각 뒤편으로는 축대를 쌓았다. 숭정사정축년삼월에 순조(純祖) 17년(1817년)에 열녀각을 세웠다.

 

남양인 홍수정의 처 장연노씨는 남편의 병이 중하여 오랜시간 병석에 누워있게 되자 어떻해든 남편의 병을 고치려는 일념으로 인근에 병을 잘 고친다는 의원에게 남편의 병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약을 지어줄 것을 청하자 의원은 고개를 흔들며 백약이 무효하고 한가지 방법 으로는 사람의 고기인 인육을 먹어야 날수 있는 병이라는 소리를 듣고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허벅지살을 도려내어 남편에게 먹여 남편의 중한 병을 고치니 이 소식이 원근에 전해져 나랏님께도 전해지니 순조17년(1817년)에 정려를 명받아 열녀각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장연노씨에 대하여 전해지는 아류의 이야기가 또 있다.


부인 장연노씨는 남양 홍씨 충평공의 손자며느리이다. 그의 남편 홍수정과 함께 부인 장연 노씨는 효부이면서 열녀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 내력을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충북 괴산군 칠성면 송동마을에 홍수정이라는 선비가 살고 있었는데 마음씨도 착하고 부지런하였지만 항상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면서도 늙으신 어머님을 알뜰하게 모시고 부인 장연 노씨와 함께 별로 큰 어려움 없이 생활하고 있었다.그렇게 지내던 어느날 노쇠하신 어머니가 우연히 병환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두 부부는 굶기를 밥먹듯이 하면서도 병든 시어머니만은 정성껏 모셨다.남편 홍씨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남의집 품팔이를 하였고 겨울에는 나무를 해다 팔아서 생활비를 마련했으며 부인 노씨는 집안일은 물론이며 남자 못지 않게 들일도 열심히 했으며 또 틈틈히 베를 짜면서 가난한 생활을 돕고 있었다. 겨울바람이 세차게 불던 어느날 남편 홍씨는 여느때와 같이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웬일인지 오늘따라 아침나절에 나무를 한짐 해다 놓고서도 또 나무를 하러 가는 남편을 보고 부인 노씨가 “날씨도 춥고 바람도 세차니 나무하러 가지 말고 내일 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남편 홍씨는 “어머님의 약값도 벌어야 하고 떨어져 가는 양식도 사야 한다”며 부인 노씨가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또 나무를 하러 갔다.


이윽고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땅거미가 서서히 내리는데도 산에 간 남편 홍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부인 노씨는 저녁을 지어 놓고 초조하면서 두렵기까지 한 마음을 억누르며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밤은 점점 깊어가고 어둠이 세상을 뒤엎은지 오래 되었건만 아무리 귀를 귀울여도 남편의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드디어 부인은 남편 홍씨를 기다리다 못해 호롱불을 켜들고 평소에 남편이 나무하러 잘 가던 산을 향해 집을 나섰다.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속에 호롱불 하나를 의지하고 앞으로 걷기만 하는 노씨부인 귀에 그날따라 산골짜기에서 들려 오는 물소리는 더욱 오금을 못쓰게 하는 울음소리 같기만 했다. 그때 였다. 비몽사몽간에 남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더니 정신도 차릴 겨를없이 시커먼 그림자가 휙하고 부인 옆을 지나갔다. 부인이 한참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행히 남편 홍씨가 호랑이로부터의 위험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것이었다. 남편의 옷은 갈기갈기 찢기고 몸은 상처투성이었으며 너무 놀란탓인지 거의 빈사지경에 이르렀다.
부인은 죽을 힘을 다해 남편을 등에 업고 집으로 데려 왔다. 남편의 상처는 무척 심했는데 집안이 가난한 탓으로 돈이 없어 의원을 부를 수도 없는데다가 약도 변변히 쓰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부인 노씨는 밤을 새워가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남편을 정성껏 간호했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워가면서 간호한 탓으로 몹시 피곤해 깜빡 잠이 들었을때 꿈을 꾸게 됐다. 부인의 꿈속에 어느 백발노인이 초연히 나타나 하는 말이 “남편의 상처는 사람고기를 먹으면 쉽게 나을것이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깜짝 놀라 잠을 깬 부인 노씨는 아까 꿈속에서 그 노인이 한 말이 예삿말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의 고기를 구할 길이 없었다. 생각다 못해 부인 노씨는 남편을 위해 자기 살을 베어 약으로 쓰기로 결심하고 뒤꼍의 장독위에 냉수를 떠놓고 남편의 상처가 하루빨리 낳게 해 달라고 빌고는 부엌칼로 자신의 허벅지를 베어 삶은것으로 남편에게 먹게 했더니 그 때문인지 과연 남편의 상처가 아물고 부기도 빠져 차츰 완쾌됐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온 마을에 퍼지고 곧 이웃마을에 퍼지게 됐다. 마침내 이 소문이 원님에게까지 들려오게 돼 원님은 부인 노씨의 정열을 깊이 찬양하고 열녀각을 세워 후세 사람들에게 알리고 본받게 했다. 원래 부인 노씨는 아이를 낳지 못했는데 그 일이 있은후 아들 셋을 낳아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지금도 남양 홍씨 충평공의 후손들이 1년에 한번씩 제사를 지내고 그의 정열을 기리고 있다.<증평,괴산저널 참조>

 

 

열녀각 밑으로는 남양홍씨남양공파사용공계31세휘재봉직손묘원南陽洪氏南陽公派司勇公系31世諱在鳳直孫墓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