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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성면 관정리 묵정사(琅城面 官井里 墨井祠)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낭성면 관정리 묵정사(琅城面 官井里 墨井祠)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4. 3. 8. 05:35

낭성면 관정리에 있는 묵정사는 1971년에 신덕린(申德隣), 신포시(申包翅), 신장(申檣), 신식(申湜), 신용(申涌), 신집(申潗)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겹처마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인데,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3개의 쌍문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으며, 육현사(六賢祠)라는 편액을 걸었고, 마당 앞에 사제문(思齊門)이라는 현판을 내걸은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이맛돌에는 묵정사원(墨井祠院)이라고 각자되어 있다. 

 

묵정서원안에 있는 육현사 모신 사람들의 비석입니다.

신집은 조선 전기의 효자입니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호는 종산(種山)이다. 문과에 급제한 이듬해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나갔다가 청요직을 거쳐 감사를 역임한 신용(申涌)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신득치(申得治)이다. 1684년(숙종 10) 정시(庭試) 갑과(甲科)에 장원한 신필청(申必淸)이 그의 아들이다. 부인은 권서(權緖)의 딸이다.어려서부터 천성적으로 효행을 타고 났었다. 9살에 그의 조부 신용이 한양에서 작고하였을 때 부음을 듣고 성인처럼 애통해 하였으며, 상을 마칠 때까지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부친상을 당했을 때에도 애통함이 도를 넘을 지경이었다. 엄동설한에도 날바닥에 기거하면서 주야로 슬피 곡을 하였다.장례를 마친 뒤 중문 밖에서 시묘살이 하면서 질대(絰帶)를 풀지 않았고, 3년상을 마칠 때까지 채과(菜果)를 먹지 않았다. 관찰사가 조정에 보고하여 사미(賜米)되었고, 또 회갑이 넘은 나이에 모친상을 당하여서도 한결같이 예로서 상을 마쳤다.숙종(肅宗) 임금이 특명으로 관직을 제수하고 정려(旌閭)하였다.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관정리에 효자문에 세워져 있다. 신집 [申潗]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낭성면 관정리 신집효자문 파평윤씨열녀문(琅城面 官井里 申潗孝子門 坡平尹氏烈女門) (tistory.com)

 

낭성면 관정리 신집효자문 파평윤씨열녀문(琅城面 官井里 申潗孝子門 坡平尹氏烈女門)

낭성면 관정리에 있는 신집의 효자문과 신우권의 아내 파평윤씨의 열녀각이 같이 있다. 신우권은 신집의 현손이다.가까운 곳에 묵정서원과 묵정영당 신중엄의 신도비 그리고 백석정등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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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申涌, 1560~1631)은 조선조 문신. 본관 고령. 자 계수(季收), 호 하은(霞隱), 초명은 설(渫). 청원군 낭성면 관정리 출신. 부친은 중엄(仲淹)이다. 12세에 아버지를 따라 임소(任所)에서 왜사(倭使)를 보았는데 왜사가 그의 명수(明秀)함을 기특하게 생각하여 부시(賦詩)를 청하니 즉시 다음과 같이 읊었다. ‘扶桑三島外 華岳五雲中 兩國千年好 孤舟萬里通’이라 하니 왜사는 손뼉을 치며 탄상(歎賞)하였다고 한다. 1591년(선조 24) 문과에 급제,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문원 정자로 의병을 일으켰다. 뒤에 벼슬이 황해감사에 이르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청주의 봉계서원(鳳溪書院)과 청원군의 묵정서원(墨井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의례고람(儀禮考覽) 6권․상례통재(喪禮通載)( 2권, )오복통고(五服通考) 2권 등이 있다.[ 문헌]    여지도서,    청주시지.

 

신식(申湜, 1551~1623)은 조선조 문신. 본관 고령. 자 숙지(叔止), 호 졸재(拙齋). 청원군 낭성면 관정리 출신. 신숙주(申淑舟)이 5세손이며 부친은 현령을 지낸 중엄(仲淹)이다. 성운, 이황의 문인으로 선조 9년(1576) 별시문과에 급제, 지평, 헌납을 거쳤다. 1590년 집의로 있을 때 정여립의 일파라는 탄핵을 받고 곤양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안무어사가 되었으며, 1599년 공조참판, 1608년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어 부제학 대사헌을 거쳐 지중추부사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1695년 청원군 낭성면 무성리의 쌍천서원과 묵정서원(墨井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의례고증, 가례언해) 등이 있다. 
[ 문헌]    국조방목,    조선왕조실록,    청원군지,    청주시지,    충청북도인물지,    호보,    한국인물대사전.

 

신장 申 은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제부(濟夫), 호는 암헌(巖軒). 신사경(申思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고려 전의판서(典儀判書) 신덕린(申德隣)이고, 아버지는 고려 공조참의 신포시(申包翅)이며, 어머니는 김충한(金忠漢)의 딸이다. 아들은 신숙주(申叔舟)·신말주(申末舟)이다. 1402년(태종 2)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상서녹사(尙書錄事)가 되었다. 다음 예조정랑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춘추관동지사로서 『정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뒤에 중군도총부총제(中軍都總府總制)·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거쳐 공조좌참판에 이르렀다.대제학을 오래 맡아, 당시 유학에 통달한 권위 있는 학자로 추앙을 받았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포시 申包翅 는 조선 전기 고령 출신의 문신입니다.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호촌(壺村). 고령신씨(高靈申氏)의 시조로 알려진 검교군기감사(檢校軍器監事) 신성용(申成用)의 현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사경(申思敬)이고, 아버지는 예의판서 보문각제학(禮儀判書寶文閣提學)을 지낸 신덕린(申德隣)이다. 세조 대에 삼정승을 모두 지낸 신숙주(申叔舟)가 손자이다. 장인은 김충한(金冲漢)이다.

신포시(申包翅)는 1383년(우왕 9) 생원으로 태종 이방원과 함께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427년(세종 9) 전내자윤(前內資尹)이었고, 뒤이어 통정(通政)에 임명되었다가 판전농(判典農)을 제수 받고 곧 봉상(奉常)으로 임명되었다. 1428년(세종 10) 사간(司諫)으로서 직임을 수행하면서 공법 제정, 신분제, 행정 제도의 문제와 관리들의 비리 척결에 대한 주장을 펼치는 등 개국 초창기의 문물제도의 설행에 앞장섰다. 1430년(세종 12)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아버지 신덕린처럼 글씨를 잘 썼는데, 그의 필적이 『해동필첩(海東筆帖)』에 남아 있다. 묘소는 전라남도 곡성군 오산면에 있다.

찬성(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전라북도 남원시 송동면의 두곡서원(杜谷書院)에 장인 김충한과 함께 배향되었다. 신포시는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켰으면서도 조선 왕조의 정통성도 인정하여 세종 대 벼슬에 나왔기 때문에, 조선 후기 ‘고려 두문동 72현’에 선정되었다. 신포시 [申包翅]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신덕린 申德隣 은 생몰년 미상. 고려말∼조선초의 서화가입니다.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불고(不孤), 호는 순은(醇隱).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성용(成用)의 4대손으로 벼슬은 예의판서(禮儀判書)를 거쳐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을 지냈다.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등과 친교가 있었고 고려가 망한 뒤에는 광주(光州)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해서·초서·예서에 모두 능하여 당대에 이름이 높았으며, 특히 예서의 한 종류인 팔분체(八分體)로 많은 글을 썼다고 한다.

그의 필체는 독특하여 당시 사람들이 덕린체(德隣體)라고 불렀다. 그의 그림으로는 구덕수궁미술관 소장인 「산수도(山水圖)」가 있으나 양식면으로 볼 때 조선 후기의 남종화(南宗畫)와 유사점이 많이 보이는 작품이므로 그 진위여부를 알기 힘들다. 그의 서체의 모간(模刊)은 『고금법첩(古今法帖)』에 전한다. 두문동 72현의 한사람으로 고령의 영연서원(靈淵書院)에 배향되었다.신덕린 [申德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