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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성면 관정리 신집효자문 파평윤씨열녀문(琅城面 官井里 申潗孝子門 坡平尹氏烈女門)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낭성면 관정리 신집효자문 파평윤씨열녀문(琅城面 官井里 申潗孝子門 坡平尹氏烈女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7. 2. 7. 06:46

 

 

 

 

낭성면 관정리에 있는 신집의 효자문과 신우권의 아내 파평윤씨의 열녀각이 같이 있다. 신우권은 신집의 현손이다.가까운 곳에 묵정서원과 묵정영당 신중엄의 신도비 그리고 백석정등의 문화재가 자리하고 있다. 한식음식점인 대궐앞에 자리하고 있다.

 

 

 

묵정리는 고령신씨가 대성이다.  고령신씨의 시조는 고려조에서 군기감검교를 지낸 신성용(申成用)이고 중시조는 보한재 신숙주(申淑舟)의 일곱째 아들로 영성군(靈城君) 신형(申泂)이다.입향조는 영성군의 맏아들인 신광윤(申光潤)으로 연산군 때에 갑자사화(1504) 당시 영의정 윤상필이 공의 외손서가 되므로 연좌되어 고초를 겪었다. 다행이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1510년(중종5)경 현재 청원군 북이면 용계리 모애(茅涯)마을로 낙향하였다. 그러나 1537년 그 곳에서 맏아들 신서(申漵)가 사망하자 1540년(중종 35) 청주의 상당산(上黨山)[419m] 동쪽인 청원군 낭성면 묵정리 머그미마을을 택하여 복거하였다. ‘머그미’란 마을명은 이 동네의 우물이 마치 먹물처럼 검게 보이나 떠올려 보면 맑았음으로 ‘먹우물동네’라는 말이 변환하여 머그미라는 속명이 붙혀졌고 한자로 표기하여 묵정리(墨井里)라 하였다고 전한다. 머그미신씨는 이후 크게 번연하여 대족을 이루었고, 집성촌은 청원군 낭성면 관정리, 추정리, 호정리, 귀래리, 청원군 미원면 등지로 퍼져나가 250여 호에 이르렀으며, 머그미에는 현재 육현사(六賢祠)를 비롯하여 여러 기념물이 남아있다.

 

 

 

 

신집(申潗)은 조선 전기의 효자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호는 종산(種山)이다. 문과에 급제한 이듬해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나갔다가 청요직을 거쳐 감사를 역임한 신용(申涌)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신득치(申得治)이다. 1684년(숙종 10) 정시(庭試) 갑과(甲科)에 장원한 신필청(申必淸)이 그의 아들이다. 부인은 권서(權緖)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천성적으로 효행을 타고 났었다. 9살에 그의 조부 신용이 한양에서 작고하였을 때 부음을 듣고 성인처럼 애통해 하였으며, 상을 마칠 때까지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부친상을 당했을 때에도 애통함이 도를 넘을 지경이었다. 엄동설한에도 날바닥에 기거하면서 주야로 슬피 곡을 하였다. 장례를 마친 뒤 중문 밖에서 시묘살이 하면서 질대(絰帶)를 풀지 않았고, 3년상을 마칠 때까지 채과(菜果)를 먹지 않았다. 관찰사가 조정에 보고하여 사미(賜米)되었고, 또 회갑이 넘은 나이에 모친상을 당하여서도 한결같이 예로서 상을 마쳤다. 숙종(肅宗) 임금이 특명으로 관직을 제수하고 정려(旌閭)하였다.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관정리에 효자문에 세워져 있다.

 

 

 

 

 

이 효열각은 조선 순조 7년(1807)에 효행으로 참판(參判)에 증직된 고령인(高靈人) 종산(鐘山) 신집(申潗, 1623~1689)과 열녀 신우권(申佑權)의 처 파평 윤씨(坡平尹氏)의 효열을 기리어 세운 정려이다. 지금의 효열각은 광무 2년(1898)에 중수하고 1985년에 도로공사로 헐리게 되자 마을 안쪽인 지금의 위치로 이전한 건물로서 정면 1간, 측면 1간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정려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는 효자·열녀정문 편액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