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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면 문덕리 월리사사적비(文義面 文德里 月裏寺事蹟碑) 본문
문의면 문덕리 월리사의 사적비와 부도 그리고 금표비가 모두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따로 따로 있던것을 도로에서 절로 진입하는 곳에 월리사 표시비와 한자리에 세워 놓았다.
금비(禁碑)는 1825년(순조 25)에 세워진 이비는 전면에 ‘이곳은 불존(佛尊)이 있는 특별한 구역이니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내용이 적혀 있으며,
뒷면에는 전답을 시주한 시주자의 명단이 적혀 있다.
월리사 사적비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월리(月裏)란 이름은 절이 높은 곳에 위치해 달과 가까이 있어 그리 불리어진 것이 아닌가 하며, 혹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절 아래에 월동사(月洞寺)가 있었는 데 절이 그 위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이름 붙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데 믿을 수 있는 지는 의문이다.
절은 옛날에 한 작은 암자였는데 언제 세워졌고 언제 황폐해졌는지 알지 못한다. 1657년(효종 8년)에 명현당(明玄堂) 원학대사(元學大師)가 우연히 절의 기록을 보고 절의 중창하려 돈과 재물 그리고 장인(匠人)과 돌을 마련하였다. 우선 산 아래 신흥사(新興寺)로 재료를 옯겨 두어 우선 불전(佛殿)을 세워 금상(金像)을 봉안하였다. 또 요사(寮舍)와 선실(禪室), 누각, 행랑채, 푸주간, 목욕간 등을 차례로 완성하였으며, 각명(覺明) 신현(信玄) 등은 그림을 그렸다. 붉은 난간 푸른 기와 등의 화려함은 벼랑과 계곡의 아름다움을 압도할 정도였다.
1678년(숙종 4년) 동쪽 위쪽에 실(室)과 동암전(東菴殿)과 관음전(觀音殿)의 두 전각 등을 증축하고 부속 건물을 더하였다. 또 속인들로 하여금 토전(土田)을 내어 경작케 하여 부처님께 공양의 기반으로 삼게 하였다. 절의 승려 정민(淨敏) 등이 돌을 다듬고 비를 세워 스승의 일을 기록해주기를 청하여 왔기 때문에 비명을 지었다고 한다.
유명조선충청도문의월리사사적비기(有明朝鮮忠淸道文義月裏寺事蹟碑記)
형강(荊江)의 동쪽 구룡산(九龍山)의 곁에 이른바 월리사(月裏寺)란 것이 바로 이 절이다. 땅의 형세는 깊은 골짜기로 다른 특이할 점은 없지만, 절 뒤 세 봉우리의 빽빽한 돌들이 대패로 깍아 놓은 듯, 옥(玉)이 서서 연이어 솟아있는 듯 한데, 이것이 가장 볼만하다.
절 이름이 월리(月裏)인 것은 절이 높은 곳에 위치해 달과 가까이 있어 그리 불리어진 것이 아닌가 하며, 혹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절 아래에 월동사(月洞寺)가 있었는 데 절이 그 위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이름 붙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데 믿을 수 있는 지는 의문이다.
절 은 옛날에 한 작은 암자였는데 언제 세워졌으며 언제 황폐해졌는지 알지 못하지만, 중간에 초목으로 무성해졌다가 그것을 중수(重修)하였다. 또 갑자기 구릉지 공터로 피폐해져 단풍나무 녹나무 회나무 잣나무 등으로 눈에 보이는 곳은 텅 비어 허전해져서 거의 모르는 사이에 풀로 뒤덮혀 옛 터처럼 변하였다. 이에 숭정후(崇禎後) 정유(丁酉)년에 명현당(明玄堂) 원학대사(元學大師)가 우연히 기둥에 대사의 주장자(拄杖子)에 대해 적혀있는 것을 보고, 더 많은 기록을 보기를 원하며 머뭇거렸다. 이에 대사가 불연 듯 뜻을 떨쳐 일으켜 이 절의 중창을 통해 새롭게하려는 뜻을 두어 드디어 돈과 재물을 모으고 장인(匠人)과 돌을 마련하였다. 우선 산 아래 신흥사(新興寺)로 재료를 옯겨 두어 우선 불전(佛殿)을 세워 금상(金像)을 봉안하였다. 요사(寮舍)와 선실(禪室) 그리고 차례로 누각, 행랑채, 푸주간, 목욕간 등을 얽고 두르고 휘고 꺽고 이어 완성하였으며, 각명(覺明) 신현(信玄) 등 서상인(西上人)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붉은 난간 푸른 기와 등의 화려함은 벼랑과 계곡의 아름다움을 압도할 정도였다.
무오(戊午)년에 이르러 다시 동쪽 위쪽에 실(室)과 동암전(東菴殿)과 관음전(觀音殿)의 두 전각 등을 증축하였다. 또 그 앞 뒤로 기와로 이은 다섯 개의 방이 더 세워졌다. 또 세속의 백성들로 하여금 토전(土田)을 내어 경작케 하여 부처님께 공양하며 또 이 절에 큰공이 있는 학사(學師)를 기리는 것 역시 크고 좋은 일이 되지 않겠는가.
아! 부처님의 가르침이 우리 나라에서 행해진지는 오래되었다. 무릇 구역내 절을 세우고 탑을 세우는 것이 걸사(乞士)의 닦은 인연에 의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고심하며 게으르지 않고 홀로 이러한 큰 수리 작업을 행함으로써 전처럼 황폐해져 수풀로 가득찬 폐허를 다시 하나의 대법(大梵)의 집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이것은 진실로 서울에서 가까운 지방 승려의 공(功)이니, 이것이 바로 그의 공덕이 전해지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비록 그러하지만, 사람의 세대가 지나가면서 황폐해지고 후미져 결국 모양이 무너지는 것은 계속 반복되는 것이기 때문에 절의 부흥이 다시 황폐해져 수풀로 변해 폐허가 되는 것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바라건대 후대에 부도(浮屠)가 학사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받들어지기를 바라며, 이 하나의 작은 구역인 임궁(林宮)이 대천세(大千世)에 달하여도 훼손됨이 없이 영원하기를 바라노라.
절의 승려 ▨우(▨祐) 정민(淨敏) 등이 돌을 다듬고 비를 세워 나에게 스승의 일을 기록해주기를 청하여 오니 마침내 대략 그 대강을 서술하여 그 단초를 돌 면에 새기게 하노라.
세(歲) 을사(乙巳)년 냉절(冷節)에 문산(文山)의 늙은 지킴이 윤동형(尹東衡)이 찬술하고, 덕촌거사(德村居士) 오익기(吳益基)가 글씨를 쓰다.
월리사 올라가는 중에 개울건너 풀숲에 있던 부도를 월리사진입도로 입구로 옮겨 놓았다.
석종형(石鐘形) 부도(浮屠)로서 방형의 편마암계 자연석을 지대석(地臺石)으로 삼고 그 위에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단순한 형태이다. 합신에는 아무런 문양이 새겨지지 않았고, 상륜부(相輪部)는 연꽃 봉우리 형태로 만들었다.
일제시대 이후 수차례 도괴되어 개울가에 방치되던 것을 마을에 사는 신도들이 복원하였다고 한다 부도에 대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탐신부에 "이구당포윤(離坵堂抱允)" 의 탑으로 병오년 4월 6일에 세웠음이 음각되어 있어 조선후기에 월리사에 주재하던 포윤(抱允) 스님의 사리탑인 것을 알 수 있다. 건립시기는 연호가 없어 정확히 알 수 없다.
규모는 전체높이 107cm, 밑지름 49cm, 중간지름 67cm, 상륜부높이 25cm이며 , 대석은 가로 113cm x세로 91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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