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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일면 고은리 풍천공유허지(南一面 高隱里 豊川公遺墟地) 본문
경주이씨 풍천공 유허지라는 입간판이 보인다.이 곳의 지명인 고은리와 관련이 있는 풍천공 이시득의 유허지를 알리는 입간판이다.
이시득의 생몰년은 1574년(선조 7)~1640년(인조 18)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구(德久).증조부는 이발(李渤)이며, 조부는 이경윤(李憬胤)이고, 부친은 이대건(李大建)이다. 외조부는 안동김씨(安東金氏[舊]) 김도(金燾)이고, 처부는 문화류씨(文化柳氏) 유희연(柳希淵)이다
가계 |
『동춘당집(同春堂集)』 卷17, 墓碣, [행풍천도호부사 이공묘갈명(行豊川都護府使李公墓碣銘)]을 참고하여 가계 정보를 추가. |
. 형조판서(刑曹判書) 이시발(李時發)의 아우이다.어려서는 학업을 닦다가 성장해서는 붓을 던지고 무예를 익혀 선전관(宣傳官)에 천거되었다. 1606년(선조 39) 병오(丙午)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로 나가 청하(淸河)‧흥덕(興德)‧무장(茂長) 세 고을의 현감을 지냈다. 관직이 통정(通政)에까지 이르렀다.풍천부사(豊川府使)가 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낙안(樂安)의 수령이 되었다. 나이 67에 세상을 떠났다. 타고난 자품이 어질고 돈후하며 효성스럽고 우애로웠다. 관직에 나아가서는 직분을 받들어 마음과 정성을 다하였다. 만년에 의술을 업으로 삼았으며 송준길(宋浚吉)과 친하게 지냈다.
유허비에는 통정대부행풍천도호부사경주이공시득유허비(通政大夫行豊川都護府使慶州李公時得遺墟碑)라고 적혀있다.
고븐 터는 풍천공(豊川公)이 처음으로 터 잡아 삶의 터전을 이루고 자손들에게 물려준 유허지(遺墟地)이다. 곱은 터 즉 고은리(高隱里)라는 지명은 풍천공(豊川公)의 깊은 학문과 높은 덕행을 추앙(推仰)하여 고고(孤高)한 사군자(士君子)가 벼슬을 버리고 은거(隱居)한 땅이라!
이를 기리어 고사지은(高士之隱)이라고 부른데서 유래(由來)한 것이니 고은(高隱)은 바로 그 준말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이 선발(選拔) 해온 명(明)나라 지사(地師) 두사충(杜師忠)이 公의 兄인 벽오공(碧梧公)의 설득(說得)으로 죽임을 면(免)하게 된 일이 있어 그 은혜(恩惠)를 길이 보답하고자 먼저 先山을 복지(卜地)하고 난후 그 아우인 公을 위해 별도로 복지(卜地)한 곳이 公의 터전이 되었다.
公은 慶州李氏니 휘(諱)는 시득(時得)이고 字는 덕구(德久)이며, 풍천도호부사를(豊川都護府使)를 지냈음으로 풍천공(豊川公)이라 일컫는다.
시조(始祖)는 신라개국좌명공신(新羅開國 佐命功臣)이고, 고려명신(高麗名臣) 익재선생(益齋先生) 제현(齊賢)의 十一代孫이며 송천서원(松泉書院)에 배향(配享)된 증좌찬성(贈 左贊成) 오촌(梧村)선생 대건)大建)의 次子요. 형조판서(刑曹判書) 증영의정(贈領議政) 벽오(碧梧) 시발(時發)의 아우로 宣祖 7년 5월 18일 오창(梧倉)서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났고, 仁祖 18년 5월 2일에 졸(卒)하니 향년 67세였다.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槐山郡 靑川面 華陽洞)에 예장(禮葬) 했다가 仁祖 27년 청원군 가덕면 삼항리(淸原郡 加德面 三項里) 양자원(良坐原)에 이장(移葬) 하였다. 公은 어려서부터 兄인 벽오공((碧梧公)을 따라 공부하였고 일찍 학문을 익혀 성균관(成均館)의 경의문대(經義問對)에 합격하여 박사(博士-正七品)에 올랐다.
그러나 뜻한바 있어 붓을 던지고 무예(武藝)를 익히더니 곧바로 추천되어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다. 선조 39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從六品)를 거쳐 청하(淸河-오늘날 경남 하동), 흥덕(興德-전라북도 고창), 무장(茂長-고창군 무장읍) 현감(縣監-從六品)을 역임 하였다.
원사(元師) 강홍립(姜弘立)이 노추(奴酋-누르하치를 가리침) 투항(投降)하고, 체찰사(體察使) 장만(張晩)은 변방에 있어 평안도 일대가 소란하고 인심이 흉흉하였다.
이에 光海君은 벽오공(碧梧公)을 불러 오도찬획사(五道贊劃使)를 삼고 이를 수습([收拾]하게 할 때, 그 노친(老親-늙은 부모)이 오래 떨어져 있을 것을 민망히 여겨 그 아우인 公으로 하여금 모시고 위로해 드리도록 특히 풍천도호부사를 제수하였다.
뒤에 낙안군수(樂安郡守)로 나갔으나 병으로 사퇴(辭退)하고, 임기전에 돌아왔다. 한때는 높은 벼슬길에 뜻을 두기도 하였으나 그 뜻을 버리고 향리에 묻혀 조용히 지내며, 학문과 독서에 전념하였다.
公은 천성(天性)이 어질고 겸손하며 후덕하였고, 天資가 웅위(雄衛)하여 신장(身長)이 과인(過人) 하였으며, 무략(武略)이 출중하였다. 유복자로 태어나 편모슬하(片母膝下)에서 어머니의 사랑도 유달 지만 孝誠도 지극하였다.
어머니를 위해서는 기거(起居)에 불편함이 없도록 가마 같은 탈것을 비롯하여 갖가지 기구(器具) 까지도 고루 갖추어 편안하게 모셨고 어머니 상을 당해서는 육순을 바라보는 고령임에도 지성으로 3년간 시묘(侍墓) 살이를 하였다.
벼슬길에서는 권귀(權貴-權門貴族의 준말)의 눈치를 살피는 일이 없었고 또한 이에 눌리지도 않았으며, 오직 공명정대하게 모든 공사를 처리하였다. 따라서 많은 백성들의 누명도 벗겨주었고, 억울함도 풀어주었으며 혹은 부당하게 약탈(掠奪) 당한 토지 등을 찾아주기도 하였음으로 백성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公의 선정을 기리었고 조정에서는 그 청렴하고 강직함을 칭송하였다.
公은 언제나 검소(儉素)한 삶이 한사(寒士)와 같았고 명예(名譽)를 구하지 않았기에 권귀(權貴)의 문(門)을 두드릴 일도 없었다. 부인(夫人)은 문화유씨(文化柳氏) 부사직(副司直) 희연(希淵)의 딸로 증좌승지(贈左承旨) 경회(慶會)와 3녀를 두었고 후부인(后夫人)은 온양정씨(溫陽鄭氏) 사직(司直) 태형(台型)의 딸로 성균생원(成均生員) 경복(慶復)을 두었다.
公의 유훈(遺訓)에 따라 자손들은 고사지은(高士之隱)의 전통을 지키면서 높은 선비정신의 함양과 학문연마(學問硏磨)를 게을리 하지 않았음으로 많은 선비들이 속출하였고 승지(承旨), 참판(參判), 병사(兵使), 대사헌(大司憲), 부사(府使), 현감(縣監)들이 나왔고, 현재는 박사며 교수들을 위시하여 사회 각계각층에서 많은 후손들이 빛을 내고 있다.
번연(蕃衍) 해온 자손들은 150여 호에 이르렀으나 계속 도시로 진출하여 호수는 날로 줄어들고 있다.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이 찬한 묘갈이 있고, 동종(同宗)인 참판(參判) 중협(重協-국당공후-정순공후-24世 左贊成 惟一의 玄孫임/무진보 서문을 씀)이 찬한 묘지명(墓誌銘)이 있다.
公의 유허임을 표식(表識)하고 아울러 公을 위한 강당(講堂)을 짓기로 하고 건립위원회가 발족되었다. 12대손 충주비료공장전총무과장(忠州肥料工場前總務課長) 덕희(德熙)는 대지(垈地)를 11대손 상진(相陳)은 구가(舊家)를 헌성(獻誠)하였고, 10대손 株式會社 日山金屬會長喆雨는 재정(財政)을 12대손 民主平和統一諮問委員) 南熙는 감역(監役)을 맡고 委員一同이 세우기로 하였다.
성균관전학(成均館典學) 상진(相陣)이 글을 짓고, 12대손 成均館大學校 前 文科大學長 文學博士 春熙가 삼가 글을 썼다. 公紀 1998년 戊寅 3月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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