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청안면 읍내리 비림(淸安面 邑內里 碑林)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청안면 읍내리 비림(淸安面 邑內里 碑林)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6. 6. 7. 13:25

청안면 읍내리 청안행정복지센타 옆에 자리하고 있는

청안군내에 흩어져 있던 청안을 거쳐간 현감,군수,관찰사등의 선정비를 14기 모아 놓은 곳입니다.

 

조선조 인조시대때 청안현감을 지낸 조 흡(趙 潝,)의 선정비이다

비석의 전면에는 현감조공흡선정비(縣監趙公潝善政碑)라고 음각되여 있으며 비석은 두동강이 나서 접합하여 놓았다.

 

조흡

 

조흡

국조(國朝)의 조씨(趙氏)는 풍양(豐壤)에서 나온 집안이 가장 훌륭한 가보(家譜)로 꼽히는데, 그중에서도 양주(楊州)의 광암리(廣巖里)에 장사지낸 이들이 더욱 훌륭하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조

terms.naver.com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조흡은 인조7년(1629년)에 청안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었음을 알수있다.

''''淸安縣監趙潝, 慈祥廉潔, 自奉甚簡, 凡干民役, 任其爲民甚便之, 稱善不已, 皆以爲, 若失此倅, 吾何以生哉云云。但賦役多滯, 官無宿儲, 日用難繼, 經過極艱云, 蓋悅民之意爲主, 而奉公之意未至, 若此者去之, 則民情缺望, 存之, 則官事無可擧之期爲白齊。□-----

 

비석의 전면에는 관찰사심공의신선정비(觀察使沈公宜臣善政碑)라고 음기되여 있다. 

심의신은 1791년(정조 15)~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순흠(舜欽)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거주지는 경(京; 서울)이다.
증조부는 심구(沈銶)이고, 조부는 심건지(沈健之)이며, 부친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안동진관병마동첨절제사(安東鎭管兵馬同僉節制使) 심능술(沈能述)이고, 생부는 통훈대부 해주진병마절제도위(海州鎭兵馬節制都尉) 심능악(沈能岳)이다. 외조부는 참판(參判) 김이희(金履禧)이고, 처부는 예조판서(禮曹判書) 민명혁(閔命爀)이다. 동생으로 심의린(沈宜隣)이 있다.
1810년(순조 10) 식년시 진사 3등에 23위로 합격하였으며, 1829년(순조 29) 정시 병과에 26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이조참판(吏曹參判)‧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등을 역임하였으며, 품계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829년(순조 29) 중궁전승후관(中宮殿承候官)으로서 통정대부에 가자되었다. 1837년(헌종 3)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충청 지역을 진휼(賑恤)한 후 장계(狀啓)를 올렸다. 같은 해에 비밀리에 장계를 올려 대흥군(大興郡)의 괘서(掛書) 사건에 관련된 성국로(成國老)‧이종려(李鍾呂) 등을 조정에서 국문(鞠問)하여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일이 커지는 것을 반대하던 대왕대비의 저지로 금부도사(禁府都事)의 입회하에 성국로와 이종려는 도신(道臣)이 직접 참형(斬刑)으로 다스려졌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이후연(李厚延)은 조선조 정조시대때 청안현감을 지낸 인물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후연은 정조23년 1월19일(무인)년인 1799년 청안현감에 제수된다.

비석의 전면에는 현감이공후연청덕선정비(縣監李公厚延淸德善政碑)라고 음기되여 있다.

 

○ 再政。以尹光心爲南原府使, 徐龍輔爲戶曹參判, 蔡弘履爲知敦寧, 徐邁修爲同經筵, 趙鎭寬爲尙衣提調, 李晩秀爲觀象監提調, 朴彝源爲敬陵令, 安廷瓛爲典牲判官, 姜世靖爲平市主簿, 柳明觀爲長興主簿, 金直行爲廣興奉事, 李建胄爲司䆃奉事, 鄭來重爲典牲副奉事, 李集玉爲掌樂主簿, 李厚延爲淸安縣監, 成光默爲慶基殿令, 肇慶廟令李昌熙, 監察朴和源相換。

 

비석에는 관찰사김공응근불망비( 觀察使金公應根不忘碑)라고 적혀 있습니다.

 

김응근은 본관은 안동. 자는 계경(溪卿), 호는 의석(宜石). 증조할아버지는 승지를 지냈고 좌찬성에 증직된 김제겸(金濟謙)이고, 할아버지는 목사를 지냈고 좌찬성에 증직된 김이경(金履慶)이며, 아버지는 이조 참판을 역임한 후 영의정에 증직된 김명순(金明淳)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첨정을 지내고 좌찬성에 증직된 신광온(申光蘊)의 딸이다. 부인은 정부인 용인 이씨(龍仁李氏)로 영의정을 지낸 이의현(李宜顯)의 증손녀이고 첨추밀원사 이재순(李在純)의 딸이다. 아들은 조선 말 영의정, 좌의정, 내각총리대신 등을 역임한 김병시(金炳始)이다.동생은 규장각 제학을 지낸 김흥근(金興根)이다.

 

김응근(金鷹根)[1793~1863]은 1816년(순조 16) 사마시에 합격하여 1822년(순조 22) 익위사세마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사어(司禦)를 거쳐 공조 좌랑 및 정랑, 사복시 주부, 충훈부의 도사, 경모궁(景慕宮) 사직서령, 종친부 전부, 제용감 판관(濟用監判官), 선혜랑, 군자감정(軍資監正) 등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의흥 현감, 임천 군수, 평양부 서윤, 서흥 부사, 수원부 판관, 부평 부사, 청주 목사를 거쳤다. 1855년(철종 6) 가선(嘉善)이 되고, 1857년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1858년 가의(嘉義)로 올랐고, 1859년 자헌(資憲)이 되었다. 1860년 공조 판서와 형조판서를 지냈고, 1862년(철종 13) 정헌(正憲)에 올랐다. 1863년(철종 14) 7월 12일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조 순조14년인 1814년에 청안현감으로 제수된 이병순의 선정비이다.비석의 전면에는 현감이후병순선정비(縣監李侯秉淳善政碑)라고 음기되여 있다. 

 

순조14년 승정원 일기를 보면 ....洪世周爲稷山縣監, 李秉淳爲淸安縣監, 李元肅爲庇仁縣監....적혀있다.

 

비석의 전면에는 관찰사민공영상선정비(觀察使閔公泳商善政碑)라고 음기되여 있다.

 

민영상의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이경(伊卿). 이현(彛顯)의 증손이며 정용(正鏞)의 아들이다. 외조부는 권제형(權躋亨)이다.

1872년(고종 9) 문과에 합격하였다. 1878년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이듬해 이조참판이 되었다.1885년(고종 22) 8월에는 공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그 해 형조판서를 지냈다. 1886년 3월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1889년 3월까지 재임하였다.그 해 4월 예문관제학, 6월 한성부판윤을 차례로 역임하고, 7월에는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890년에는 홍문관제학이 되었고, 그 해 11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 후 시강원좌빈객,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894년 7월에는 내무아문대신(內務衙門大臣)에 임명되었다.1897년에는 품계가 정일품(正一品)에 이르렀다. 1899년에는 궁내부특진관 칙임1등관이 되었다. 그의 아들 종식(宗植)은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10년 8월에 문헌(文獻)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고종20년 6월25일 1883년에 청안현감을 지낸 김승규의 불망비이다.

비석의 전면에는 행현감김후승규불망비(行縣監金侯勝圭不忘碑)라고 음기되여 있으며 비석의 조성시기는 을유(乙酉) 1885년 3월이다.김승규(金勝圭)는 원래 이름이 김승균(金勝均)이였으나 김승규(金勝圭)로 개명하였다.승정원일기 에 의하면 1883년 청안현감으로 제수되였다.....洪用觀爲尙瑞主簿, 金勝均爲淸安縣監, 朱冕燮爲石城縣監, 李時庠爲引儀, 金膺遠爲尙衣別〈提〉......,

김승규는 원래 이름이 김승균이였으나 김승규로 개명하였다. 고종22년 1885년 승정원일기를 참조하면

淸河縣監金勝均名字, 改以勝圭 라고 적혀있다.

 

 

조선조 청안현감을 지낸 서사원(1550~1615)의 선정비이다

선정비의 전면에는 현감서공사원청덕비(縣監徐公思遠淸德碑)라고 음기되여 있다.

서사원은 호가 낙재이며 낙재(樂齋)의 본관은 달성이며 자는 행보, 호가 낙재인데 한강 정구에게서 글을 배우고 여헌, 장현광, 정경세 등과 도의의 교분을 가졌다.낙재는 선조17년(1589) 익위(익위-세자익위사에 소속된 정5품의 벼슬) 를 거쳐 호조정랑에 올랐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임란중에 청안현감에 임명되어 문교를 진흥하였다. 

 

청안면 읍내리 청안동헌앞 마당에 세워져 있는 군수 홍종익의 영세불망비이다

비석에는 행군수홍후종익영세불망비(行郡守洪侯鍾益永世不忘碑)라고 음기되여 있으며 비석의 조성시기는 경자(庚子)1900년 2월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홍종익은 고종30년 11월5일(계사) 1893년에 청안현감으로 임명된다.

....沈能秀爲懿寧園守奉官, 白陽洙爲順康園守奉官, 趙駿九爲金海府使, 洪鍾益淸安縣監, 幼學王翼說今招通政,.....

 

인조시대때 청안현감을 지낸 김효성의 선정비이다. 청안동헌 앞마당에는 청안면내에 흩어진 각종 불망비를 한군데로 모아 놓았다.

현감 김효성의 비석도 그 중에 하나이다.비석의 전면에는 현감김공효성선정비(縣監金公孝誠善政碑)라고 음기되여 있다.

 

승정원 일기에 의하면 김효성은 인조원년 4월21일 1623년(경진)에 청안현감으로 관직을 제수 받는다

○ 有政。以張維·李植爲吏曹佐郞, 李敬輿爲副校理, 朴知誡爲持平, 申景禛爲兵曹參判, 朴東善爲兵曹參議, 李安眞爲靑陽縣監, 權淰爲大興縣監,金孝誠淸安縣監, 李藩爲淸河縣監, 南以恭爲羅州牧使。出延興府院君家日記所謄朝報

 

 

고종34년(신유) 1897년 청안군수를 지낸 군수 한성회(韓聖會)의 선정비이다.비석의 전면에는 군수한후성회선정비( 郡守韓侯聖會善政碑)라고 음기되여 있으며 비의 조성시기는 신축(申丑)년 3월(1901년)이다.한성회의 비석은 청안면사무소옆에 2기가 자리하고 있다. 청안면사무소옆 공터에는 청안면 내에 있던 각종 선정비를 한군데 모아 놓았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한성회는 고종34년 12월 6일(신유년)에 청안군수로 임명이 된다....任鐵原郡守具鳳祖, 任淸安郡守韓聖會, 任昌城郡守柳澧烈, 任肅川郡守梁鳳濟, 任平康郡守李喆和....고종38년 8월 28일(신축) 청안군수였던 한성회를 교하군수로 임명하는 대목이 나온다.임무를 마치고 간 그해 신축년에 비를 조성한것으로 확인된다.....淸安郡守韓聖會任交河郡守, 靑陽郡守李範學任淸安郡守,......

 

조선조 청안현감을 지낸 송유검의 선정비로 추정이된다

송유검은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효종10년인 1659년청안현감으로 있다가 하직(下直)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비석에는 현감송공유@@@비(縣監宋公有@@@碑)라고 적혀있으며 비석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글씨를 판독할수 없도록 덧칠을 해놓았다.

 

....下直, 西原縣監李晩吉, 淸安縣監宋有儉, 結城縣監柳榰, 振威縣令李克寬。

송유검이 청안현감으로 내려가기전에 미리 임금에게 작별을 아뢰는 대목이다. 하직(下直)-서울을 떠나는 벼슬아치가 임금께 작별()을 아룀- 

 

 

고종34년(신유) 1897년 청안군수를 지낸 군수 한성회(韓聖會)의 선정비이다.비석의 전면에는 군수한후성회선정비( 郡守韓侯聖會善政碑)라고 음기되여 있으며 비의 조성시기는 신축(申丑)년 3월(1901년)이다.한성회의 비석은 청안면사무소옆에 2기가 자리하고 있다. 청안면사무소옆 공터에는 청안면 내에 있던 각종 선정비를 한군데 모아 놓았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한성회는 고종34년 12월 6일(신유년)에 청안군수로 임명이 된다....任鐵原郡守具鳳祖, 任淸安郡守韓聖會, 任昌城郡守柳澧烈, 任肅川郡守梁鳳濟, 任平康郡守李喆和....고종38년 8월 28일(신축) 청안군수였던 한성회를 교하군수로 임명하는 대목이 나온다.임무를 마치고 간 그해 신축년에 비를 조성한것으로 확인된다.....淸安郡守韓聖會任交河郡守, 靑陽郡守李範學任淸安郡守,......

 

전유형(全有亨: 1566∼1619)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의(儒醫)이다. 자는 숙가(叔嘉), 호는 학송(鶴松), 본관은 평강(平康)이며 전망(全網)의 아들이다. 유생(儒生)으로 선조 25년 (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趙憲)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병과 싸웠다. 1594년 청안현감이 되고, 선조 38년(1605) 문과 정시(庭試)에 장원급제하여 감찰(監察)이 됐는데, 명나라에서 군량미 10만석을 요구하자 특차사(特差使)로 명나라에 들어가 이를 줄이는데 공헌했다. 광해군 때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권신(權臣) 이섬(李贍)의 목을 벨 것을 주장했다가 그의 배척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인조 2년(1624)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무고(誣告)를 받아 성철(成哲) 등 37명과 함께 참형(斬刑)을 당했는데, 인조 6년(1628)에 신원(伸寃)이 됐다. 의술(醫術)에도 능하여「오장도(五臟圖)」를그렸다. 시호(諡號)는 의민(義敏)이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고 괴산의 화암서원(花岩書院)에 제향(祭享)됐다. 묘소는 괴산군 소수면 소암리에 있는데, 도암(陶菴) 이재(李縡)가 지은 묘표(墓表)와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염재(念齋) 정실(鄭實)이 지은 비문(碑文)이 있다.

 

청안현감전유형존성비( 淸安縣監全有亨尊聖碑 )라고 음기되어 있으며 새로 조성하여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