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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동 연원역(連守洞 連原驛)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연수동 연원역(連守洞 連原驛)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6. 8. 28. 19:23

조선 후기 지도 중 하나인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의 ‘충주’ 부분을 보면 충주(忠州) 의 오른쪽 상단에 ‘連源’ 글자와 가운데 작대기가 그려진 노란색의 동그라미를 찾을 수 있다.《 대동여지도》의 범례를 살펴보면 가운데 작대기가 그려진 동그라미는 역참(驛站)을 뜻한다. 이곳은 조선시대 때 14개 역을 관할하였다고 알려진 ‘연원역(連原驛)’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연원역은 어떤 곳이었기에 대동여지도에서까지 그 위상을 뽐내고 있을까?
연원역은 고려시대 당시 행정구역 상 평구도(平丘道)에 속한 역원 중 하나로, 조선시대에 들어와 그 위상이 높아졌다. 충청도에 속한 연원도(連原道)의 중심역이 되어 단월(丹月), 용안(龍安), 안부(安富), 가흥(嘉興), 감원(坎原), 인산(仁山) 등 6개 역을 관할하게 된 것이다. 이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편찬되던 시기에는 충주의 단월·용안·가흥, 괴산의 인산, 연풍의 신풍(新豊)·안부, 음성의 감원, 청풍의 황강(黃江)·수산(壽山)·안음(安陰), 단양의 장림(長林)·영천(靈泉), 영춘의 오사(吾賜), 제천의 천남(泉南) 등 14개 역을 관할하였고, 이후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연원역은 과연 어디였을까? 안타깝게도 택지 개발로 인해 정확한 위치는 알기 어렵다. 다만 연수동 동수마을 인근이라는 것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연원역은 사라지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연원역을 잊지 않고 있다. 2017년 연수동에 있던 연수종합상가를 옛 지명에서 그 이름을 빌려와 ‘연원 시장’으로 바꾸었다. 또 2018년에는 연수동행정복지센터 앞에 연원역 기념조형물과 연원역 유래비, 과거 연원역 찰방을 역임했던 이승열을 기리는 유애비(遺愛碑)를 설치하였다. 그 모습은 사라졌지만, 계속해서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승정원일기 2016책 (탈초본 105책) 순조 12년 6월 25일 병인 14/32 기사 1812년 嘉慶(淸/仁宗) 17년

吏批의 관원현황

○ 有政。 吏批, 行判書朴宗來進, 參判洪羲臣未肅拜, 參議鄭來百病, 右承旨金愚淳進。 以李垿爲副校理, 尹尙圭爲兼文學, 李肇源爲左參贊, 韓若霖章陵令, 李命鉉爲假引儀, 金慶魯崇靈殿參奉, 徐興輔利川府使, 金致赫熊川縣監, 鄭魯誠陽德縣監, 李升烈連源察, 故同知鄭宇璧, 贈兵參例兼, 公忠兵使鄭周誠考, 故摠管許得良, 贈兵判例兼, 折衝許復良, 贈兵參例兼, 故士人全虞鍚, 贈持平, 以上忠節卓異贈職事承傳, 左參贊單洪明浩, 右參贊單李肇源

 

 

충주시 연수동의 역사가 주민들의 관심과 노력으로 열린 공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지난 15일 오후 연수동행정복지센터 광장에서는 작지만 특별한 의미가 있는 행사가 열렸다.이날 연수동은 청사 광장에 ‘연원역(連原驛)’ 기념조형물을 설치하고 마을 주민들과 조형물 설치 관계자가 모인 가운데 간단한 제막행사를 가졌다.동은 조선시대 물류와 행정의 중심으로 인근 지역까지 아우르는 역참(驛站) 업무를 총괄하며 번성했던 연원역의 유래를 주민들에게 널리 알려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조형물을 설치했다.북벤치 형태로 제작된 조형물에는 조선시대 실록에 근거한 연원역의 유래와 함께 연원역의 규모, 그곳을 책임지던 조선시대 관직인 찰방의 업무와 행적, 연수동의 옛 지명에 대한 설명, 연원시장의 유래 등 다양한 내용이 적혀있다.또한, 동은 동편마을회관 한쪽에 위치해 존재조차도 모를 정도였던 ‘연원역 유래비’와 서편마을회관 옆에 자리하던 연원도 찰방 ‘이승열(李升烈) 유애비(遺愛碑)’도 지난 연말 청사 앞으로 옮기고 안내판을 만들어 주민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했다.연원역 유래비는 과거 번성했던 연원역의 역사를 기리고자 지역민들이 뜻을 모아 지난 1991년 10월 8일 동편마을회관 옆에 세운 것이다.이승열 유애비는 순조 14년에 세운 송덕비로 비에는 강원도와 삼남(三南)에 수해가 심한 해에 자신의 녹봉으로 민생(民生)을 구휼한 내용이 적혀있다.1980년대 후반 연원 찰방 관터(동편마을회관, 연수동 3통)에서 가까운 서편마을(연수동 4통) 소교량(小橋樑) 교체 사업장에서 출토됐으며, 발견 당시까지 조그만 도랑을 건너는 발판으로 사용되던 것을 주민들이 마을회관 옆으로 옮겨놓았다.연원의 한자는 이을 연(連), 근원 원(原)으로 오래전부터 이곳을 통한 문물의 교류와 왕래가 많았음을 짐작하게 한다.연수동 지역은 현재의 주공1,2단지 아파트 주변을 중심으로 예로부터 인마와 물류의 이동이 빈번해 역참(驛站) 업무를 총괄하기 위해 지방에 파견된 찰방(察訪)이 근무하던 곳이었다.찰방은 역리(驛吏)를 포함한 역민의 관리, 역마 보급, 사신 접대 등을 총괄하는 최고책임자였다.연원역은 찰방과 역리(驛吏) 34명, 지인 17명, 사령 10명과 수많은 노비 등 300여명이 넘게 근무했으며 대마(大馬) 3필, 기마(騎馬) 4필, 복마(卜馬) 7필을 관리했던 역도(驛道)였다.지난해 10월 연수종합상가가 연원시장으로 이름을 바꾼 것도 연원마을의 옛 지명을 살리고 번성했던 과거의 역사를 기리고자 하는 주민들의 열망과 맥이 닿아 있다.이러한 연수동의 역사를 새롭게 발굴하고 세상에 조명을 받을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든 이는 연수동에 뿌리를 두고 오랫동안 거주하고 있는 박대성씨(전 시의원)다.박 씨는 오래전부터 조선시대의 실록 등 역사자료를 꼼꼼히 살펴가며 연원역에 관한 기록을 찾아냈고, 주위에 전파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 왔다.박 씨는 “현재 많은 사람들이 연수동을 그저 번화한 신시가지로만 알고 있지만, 연수동은 과거에도 연원역을 중심으로 물류와 교통, 행정의 중심 역할을 하며 번성했던 지역”이라고 강조하며 “기념조형물과 유래비가 충주의 소중한 역사자원으로 잘 보전되길 바란다”고 말했다.한편, 연수동은 주민들의 힘으로 지켜오고 새롭게 선보이게 된 동의 역사를 잘 보존하고 스토리텔링화 하는 등 지역의 소중한 자원으로 가꿔나갈 계획이다.

 

 

연원역(連源驛)

조선시대 때에 연원역(連源驛)이 있던 연원(連源)마을과 연원역 동쪽을 지키던 망대가 산마루에 있었다는 동수마을, 비단같이 산수가 아름다워 금곡(金谷)이라 부르던 금곡 그리고 서쪽 변두리에 동네가 있어 서편이라 부르던 마을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연원역에는 종6품(琮六品)의 도찰방(道察訪) - 이조때 각도의 역참(驛站)일을 맡아보던 외직(外職) - 을 두어 (찰방터는 연수동 619번지 일대) 충주 인근의 14개 지역을 관장하였고 14개역의 마정을 다스렸다. 여기에 각 고을마다 1개소씩 마정을 설치 운영 하였으며 연원역에는 역리 34명, 지인 17명, 사령 10명, 노 155명, 비 94명, 대마 34필, 기마 4필, 목마 17필을 배치하여 관리하였음.

 

저수지

지금은 연못이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저수지 주변에 방풍림이 형성되어 주변을 싸고 있었으며 또한 입구에는 제사를 지내던 성황당(큰 느티나무와 재단)이 있었으나 '잘살아보자'는 새마을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때 연못을 메우고 성황당을 폐지하고 그 자리(현재 연수동 1226번지)에 연수동 주공아파트(101, 102, 103동) 및 연수목욕탕의 건물이 지어져 있음 저수지 주변에 있던 성황당은 조선 순조 당시 중원지역 찰방(역장북부지역관장)으로 재직하였던 이승렬은 그 해(1814년) 수해 등으로 농작물의 흉작으로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주민들에게 자신의 봉급 및 곡물을 희사하는 등 많은 공적을 쌓아서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매년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국립중원문화유산연구소에서 간행한 중원을 바라보다 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