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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낭성면 관정리 (7)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관정리는 본래 청주군 산내이상면 지역으로 조선 영조 후반(1750-1776) 관기리 묵정리가 새로이 조성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직전에는 묵정. 관기 호산. 감당. 호동 으로 이루어저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감당리를 미원면 성대리 호동의 일부를 호정리로 넘겨 주고 관기리와 묵정리의 이름을 따서 관정리라 하였으며, 활뫼,담안. 재실을 1리로 머그미.장자불. 절골을 2리로 분구 하였다. 활뫼(活山) : 관정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며, 1956년 이전에 琅城面事務所 있던 마을 관터(官基) : 활산 앞에 있는 마을로 백제때 娘臂城의 고을터라 함. 재실 : 활산 동쪽에 있는 마을로 경주김씨 재실이 있음. 담안 : 재실 동쪽에 있는 마을 칠여골 : 활산 북쪽에 있는 마을 묵정(墨井) : 머그미. 먹..
낭성면 관정리 마을초입에 있는 고령신씨산동세거비입니다. 세거비옆으로는 오석에 고령신씨의 전래를 적어 놓았으며뒷면에는 가계도를 적어 놓았습니다.
낭성면 관정2리 묵정마을 자랑비입니다. 마을의 상징인 은행나무 아래에 석주위에 오석으로 마을자랑비를 세웠습니다.청주시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2본있으며 옆으로는 신백우선생의 사적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관정2리에 있으며 마을자랑비 건립시기는 1991년입니다. 이 곳은 청원군 낭성면 관정리 옛날에는 청원군 산내이하면 묵정리 택리지에는 신촌이라 칭하였으며 위치는 청주에서 보은간 국도 22키로 호수는 칠십이며 인구는 삼백이요 생업은 농업이며 전통은 충효이고 세업은 문학이다. 고금을 통한 많은 인물과 유적문충공 신숙주선생의 묵정영당과 증좌찬성 신중엄공의 신도비가 있다. 모두 충북 도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이 고을엔 신비한 우물이 있었지 떠보면 맑은물 고였을땐 먹물같아 이래서 먹우물이라 불..
조선 숙종3(1677년)에 東部主簿를 지낸 白石亭 신교(申灚 ; 1641∼1703년)가 세운 고령신씨의 정자이다. 현재의 정자는 1927년 후손들이 중건하였다. 관정리 마을 앞 도로를 따라 마을 끝자락을 돌아가면 마을 뒷산 중턱 절벽에 바위를 의지하여 자리하고 있다. 지형상 뒤편에 산을 두고 북향하여 바위에 입지하였으며, 백석정 아래에 넓은 하천이 흐르고 있다. 건물로의 진입은 절벽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약 10m 정도 들어가면 일각대문이 놓이고 그 안에 백석정이 자리한다. 신교(申灚)는 1677년 낭성천(한강의 상류)의 芷潭 邊 절벽에 매달린 높은 바위 위에 백석정을 창건하여 自號로 白石亭이라 명명하고, 그곳에서 당대의 嶺南과 畿湖지방의 유명한 文士들과 문장과 詩歌를 짓고 교류하였다. 에는 신교가 지..
낭성면 관정리에 있는 신집의 효자문과 신우권의 아내 파평윤씨의 열녀각이 같이 있다. 신우권은 신집의 현손이다.가까운 곳에 묵정서원과 묵정영당 신중엄의 신도비 그리고 백석정등의 문화재가 자리하고 있다. 한식음식점인 대궐앞에 자리하고 있다. 묵정리는 고령신씨가 대성이다. 고령신씨의 시조는 고려조에서 군기감검교를 지낸 신성용(申成用)이고 중시조는 보한재 신숙주(申淑舟)의 일곱째 아들로 영성군(靈城君) 신형(申泂)이다.입향조는 영성군의 맏아들인 신광윤(申光潤)으로 연산군 때에 갑자사화(1504) 당시 영의정 윤상필이 공의 외손서가 되므로 연좌되어 고초를 겪었다. 다행이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1510년(중종5)경 현재 청원군 북이면 용계리 모애(茅涯)마을로 낙향하였다. 그러나 1537년 그 곳에서 맏아들 신서(申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