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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동이면 적하리 (5)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용죽리 마을버스승강장옆에 자리하고 있는 석담 전병석선생의 비석입니다.비석의 전면에는 석담 전병석님의 유시가 적혀있다.동이면은 1739년 영조 15년에 발간한 여지도서의 기록에 보면 군동면과 이남면의 일부가 현재 동이면이 된다.군동면은 수북리를 비롯하여 9개리 375호에서 남여정(男女丁 : 15세 이상 된 사람) 1,527명이 살았고, 이남면에는 평산리, 하리, 상리 등 3개리 263호에서 남여정 1,230명이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910년 일제강점기 이후 군동면을 동면이라 하고 이남면이 이남일소면과 이남이소면으로 나누어질 때 이소면의 일부에 속해 있었다. 1914년 4월 1일 동면과 이남이소면의 평산, 세산, 적하리만을 합병하여 동면의 “동(東)” 자와 이소면의 “이(二)” 자를 따서 동이면이라..
동이면 적하리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김동시구휼불망비 입니다. 경주김씨 세거지비와 함께 동네 초입에 자리하고 있습니다.비석의 전면에는 직원김동시구휼시혜비(直員金東始救恤施惠碑)라고 적혀있습니다. 적하리는 이남면(利南面)에 속해 하리(下里)라 불렀으며 1739년 여지도서에 67..
동이면 적하리에 있는 애국지사 창녕인 성권호의 공적비입니다, 성권호는 1941년에 신사(神社)·군수공장(軍需工場)·군용열차(軍用列車) 등을 폭파하려고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계획이 탄로되어 동년 2월 일경에 피체되였으며 1941년 12월 25일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
동이면 적하리에 있는 이복금의 기념비입니다.이공복금기념비(李公卜今紀念碑)라고 음기되여 있으며 좌우로 공적내용이 기술되여 있다. 평소 품성이 인자하며 전화사업에 많은 공로가 있으며 마음이 온화하며 특히 많은물질을 동네 발전을 위해 베풀은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동네주민들이 1975년 4월에 기념비를 세워 그 공로를 잊지않기위해 비석을 세웠다..
동이면 적하리 가는 길에 용죽리 못미쳐 자리하고 있는 윤구홍의 송덕비입니다.윤구홍은 새마을정신과 더불어 숭고한 충효사상으로 고취하여 마을주민들의 정신을 계도하고 부락발전에 물심양면으로 열심을 낸 공적을 후세에 기리고 그 뜻을 잊지 않기 위하여 1978년 3월1일 적하리주민일동의 이름으로 송덕비를 세웠습니다. 송덕비에는 윤구홍선생송덕비리고 한글로 쓰여있으며 후면에는 윤구홍의 공적내용이 기술되여 있습니다.비석들의 상태로 보아 원래의 자리는 아닌 듯 하며 이건한것 같습니다. 원래 적하리는 이남면에 속하여 하리(下里)라고 불렀다.조선누기 [여지도서]에도 하리라고 기록되여있다.1914년 행정통페합시 적령의 적(赤)자와 하리의 하(下)자를 합하여 적하리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