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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면 적하리 애국지사성권호공적비(東二面 赤下里 愛國志士成權鎬功績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동이면 적하리 애국지사성권호공적비(東二面 赤下里 愛國志士成權鎬功績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12. 22. 14:33



동이면 적하리에 있는 애국지사 창녕인 성권호의 공적비입니다,

성권호는 1941년에 신사(神社)·군수공장(軍需工場)·군용열차(軍用列車) 등을 폭파하려고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계획이 탄로되어 동년 2월 일경에 피체되였으며 1941년 12월 25일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아 옥고 를 치르고 1943년 11월에 출옥하였습니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하였습니다.[국립현충원]

 



공적비에는 애국지사성권호선생공적비(愛國志士成權鎬先生功績碑)라고 적혀있으며 후면에는 성권호선생의 행적이 기술되여 있습니다

성권호 선생의 생몰년은 (1921.12.28 ~ 1976. 음6,20)입니다.비석은 1985년에 세웠습니다.



공적비의 내용을 대략 살펴보면 성권호는 창녕인으로 서기 1921년 12월 28일 대전에서 출생하여 천품이 총명하고 용기가 뛰여나니 많은사람들에게 준재라

칭함을 받기도 하였다. 대전중학의 학생시절에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의분을 금치 못하고 1939년 동지인 양기영과 함께 황국신민의 서사암송,매일심사참배등 우리민족을 왜인과 동화시키려는 황국신민화 운동에 대응하여 서시암송과 신사참배의 반대의 운동을 벌여 한인학우들에게 동조할것을 계도하고 각 학교에 설치된 신사에 인분을 퍼붓는등 나름의 항일운동을 하였다. 또한 일제의 징병으로 끌려가게된 청년들의 집에 당신은 한국인임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말과 함께 태극기가 그려진 전단을 만들어 배포하여 항일사상을 주입시켰으며 신사와 함께 군수공장을 폭파시키려고 대전비행장건설공사장에서 폭약과 함께 뇌관5개를 구입하고 폭파기회를 노리다가 일본헌병대에 발각되어 1941년 2월에 체포되여 재학중이였던 대전중학에서도 퇴학을 당하고 3년간의 쓰라린 옥고를 겪으시고 1943년 11월말에 출감하시었다. 선생께서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속에서도 끊임없이 항일투쟁을 계속하시다가 1945년 조국광복을 맞이하셨으며 1976년 음력 6월26일 56세를 일기로 서거하셨다.


당신의 안락이나 영화의 길을 버리고 오직 민족의 대의인 조국광복의 투신한 공을 높이 평가하여 1977년 정부에서 건국공로표창을 추서하셨다.

선생의 불멸의 독립정신을 아로새기며 길이 후세들에게 귀감으로 삼기 위하여 보훈처 협조와 군민들의 성금으로 1985년 10월에 이 공로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