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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면 대성리 원주원씨세거비(靑山面 大成里 原州元氏世居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청산면 대성리 원주원씨세거비(靑山面 大成里 原州元氏世居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12. 26. 09:42



청산면 대성리는 원주원씨의 세거지 입니다. 마을입구에 처책을 두르고 잔디빝을 조성하여 원주원씨의 세거지임을 알리는 세거지비를 세워놓았습니다.

비석에는 원주원씨세거비(原州元氏世居碑)라고 적혀있으며 옆에는 원주원씨의 내력비가 같이 조성되여 있습니다.



대성리(大城里)는 청산현 북면 대사전리(大寺田里)에 속해 있던 마을이며, 후에 마을이름을 대성리(大城里)라 고쳐 현재에 이른다. 1739년이나 1891년 기록에는 다 같이 청산현 북면 대사전리라 하여 91호가 살았던 것으로 되어있다. 2007년말 현재 81호 165명이 살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을 하면서 옥천군에 소속시켰으며 청산현 북면 중 장연동리(長連洞里)를 청서면에 편입시키고 그 외의 마을은 청산면에 소속케 한 뒤 대사전리를 대성리라 고쳐 불렀다. 대성리라 한 것은 대사전리의 대(大)자와 성티(성촌리)의 성(城)자를 한자씩 빼내어 대성리라 하였다.


대사전리는 “한절밭”의 옛말을 한자로 쓰면서 “한”은 대(大)자로 절(마을입구에 있었던 절-기와파편 발견)은 사(寺)자로 밭은 전(田)으로 써서 대사전이라 하였으나 원 옛말의 뜻으로는 “한”은 크다는 말이며 “절“은 길다라는 말이며 ”밭“은 전이므로 ”크고 긴 밭“이란 뜻이다. 이곳 지형으로 보아 보청천가의 크고 사래가 긴 지대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큰절밭마을>큰절밭말>큰절밭>한절밭>한질밭)
성티(城峙)라 함은 “잿마”의 옛말을 한자로 쓴 것으로 추측된다.


대성리의 자연마을은 한절밭, 잿마, 월남(月南, 월내미) 등이 있으며 원주원씨(原州元氏)의 세거지로 한호팔경(閑湖八景)의 아름다운 마을이다. 1969년 3월 1일 개설하여 1995년 3월 1일 폐교된 대월초등학교 자리가 남아있으며 월남소류지와 1967년에는 축조된 대성소류지가 있다.



원주원씨의 시조 원경()은 중국 원성 사람으로 당나라 태종 때 8학사 중 한 명으로 고구려에 와서 정착하였다. 원주원씨는 4파로 나누어지는데 원경을 시조로 하는 운곡계()에서 3파가 분파되었다. 3파는 원극유()를 파조로 하는 원성백계(), 원익겸()을 파조로 하는 시중공계(), 원충갑()을 파조로 하는 충숙공계()이다.

원주원씨의 유명 인물로는 별장을 지낸 원헌()의 아들 원호()가 있다. 원호는 집현전 직제학에 재임 중 세조의 왕위찬탈을 눈치 채고 병을 핑계로 낙향한 후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은 절신()이었다. 원호()는 김덕수()의 문인으로 경사()에 통달하였고, 청백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구미포·마탄·운무에서 전공을 세워 왜군을 여주에서 완전히 봉쇄하는 전공을 세웠다.

원호의 아들 원유남()은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원계군에 봉해졌다. 아버지 원유남과 함께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평원부원군에 봉해진 원두표()는 병자호란 때 어영부사로 남한산성의 수비를 담당했고, 이후 벼슬이 우의정과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밖에 목사를 지낸 원명구()의 아들 원경하()가 영조 때 이조판서 및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아들 원인손()은 우의정을 지냈다. 원계손()은 시·서에 뛰어나 삼절로 불렸다.

원주원씨 [原州元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