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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면 백지리 백지도선조합창설자불망비(伊院面 白池里 白池渡船組合創設者不忘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이원면 백지리 백지도선조합창설자불망비(伊院面 白池里 白池渡船組合創設者不忘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12. 18. 09:27

 

 

백지도선조합창설자불망비(白池渡船組合創設者不忘碑)라고 각자되여 있다.

비석의 건립시기는  단기 4299년(서기 1966년)이다.

 

 

 

백지리는 원래 옥천군 이내면(利內面) 백지리(白池里)와 사단동리(社檀洞里)가 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1739년 기록에는 이내면 백지리에 55호가 살았고, 1891년의 기록에는 이내면 백지리에 49호, 사단동리에 8호가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007년말현재 86호 174명이 살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전면 조정 때 백자리와 사단동리가 합쳐 백지리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29년 이남면(伊南面)과 이내면(伊內面)을 합하여 이원면으로 개편하면서 백지리도 이에 속하게 되었다.


이곳은 백촌 김문기 선생이 출생하신 곳이다. 마을 유래비에 백촌선생의 효행이 알려져 효자동이라 불리었다는 이야기와 그의 충절을 길이 살려 자랑스런 후예답게 살리라는 결의가 보인다. 김문기 선생은 출생한 마을의 이름인 백촌을 호로 삼았다. 옛 선인들은 출생지나 기거하던 고장의 이름을 호로 사용한 경우가 많다. 사계 선생의 고향은 모리내(沙溪)이고, 중봉 조헌 선생은 중봉산 아래에 인봉 전승업 선생은 인봉산 아래에 사셨던 기록이 있다. 1999년에 원동에서 심천으로 통하는 도로가 개설되고 원동과 백지리 사이에 이원대교가 건설 되었는데 이 다리를 건너 우회전하다 첫번째 골짜기에서 좌회전 하면 흔읍마을인데 울산박씨(蔚山朴氏)가 대대로 이어 살고 있다. 마을 중앙에 마을 유래비가 있고 울산박씨의 선조비인 개성김씨의 효열비가 있다. 마을 앞에 백지 낙시터가 있다.


길을 따라 장동리 쪽으로 가다보면 마을 끝부분 좌측 언덕에 백지도선조합불망비가 서 있다. 강물이 육상 교통로의 큰 장애 요소였던 시절에 도강을 위한 주민들의 노력과 단결력이 보이는 좋은 자료이다. 불망비에서 동북쪽으로 휘어진 골짜기가 분토골인데 여기에 선산곽씨(善山郭氏)의 입향조인 곽유원 선생의 묘소와 재실이 있다.


분토골에는 선산곽씨의 시조공으로부터 9세까지의 선대 단묘를 모시고 있는데 그 묘소가 모두 북한땅 장단에 있기에 단묘를 모시고 제향을 올린다는 슬픈 사연이 기록되어 있다.


길을 따라 작은 고개를 넘어가면 장동리인데 이 고개를 흰고개라 한다. 흰고개 초입에서 우회전하면 오룡골이고 마을길을 따라 내려가다 우측에 채송골이 있는데 정말 양지바르고 아늑한 골짜기 이다 채송골 끝에서 남쪽으로 100여미터 지점에 삭주부사 제주고공 진손유적비(朔州府使濟州高公眞孫遺蹟碑)가 있다.


다시 흰고개에서 장동리 쪽으로 100여 미터 오르다 우회전하면 사당골로 넘어가는 길이 나온다. 이 고개를 넘으면 바로 백촌(白村) 선생의 유허비 앞에 이르게 된다. 2008년 음 6월 8일 추모제 때 그 후손들이 사육신 헌창기념비를 세웠다.


유허비에서 우측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마을앞 오룡소류지에 오룡낙시터가 있다. 유허비에서 좌측으로 100미터 가다가 좌측에 골짜기가 나오는데 이곳이 안골이다. 백읍이라 기록된 마을인데 지금은 폐촌되어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고 흔읍소류지가 있다.

 

 

 

 

 

 

 

옛날 이원면 백지리 입구 금강 변에는 옛적 에 물건을 실어 나르는 나룻배를 만들었다는 도선창설자 불망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흔 읍마을에서 사단골로 가는 길가 산 숲에 가려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마을에서는 강을 건너지 않고서 이원면소재지를 거쳐 옥천이나 영동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을 주민들과 학생들, 그리고 물건을 실어 나르는 배를 만드 는데 필요한 경비를 주민들이 지원하였다. 비 의 내용은 마을 앞 지탄 나루터에서 도선을 운 행했다는 배경과 내용, 경비를 지원한 사람들 의 이름이 새겨 있으며, 1965년 마을에서 건립 하였다고 밝혀주고 있어 당시의 모습을 밝혀 주는 귀중한 사료로 원문을 그대로 옮겨본다.

 

白池組合渡船創設者不忘碑 凡天下萬社 自萬古以來 人有不爲也 而何有古之誓言哉 今爲實踐 前組合長 李松岡 泰洙氏 以 可以稀世之大功勞矣 永沃境界 有白紙里 迤村數十個里 農土水源不足 年年早乾 而接於錦江之 回流 非島而成島 前國道無船無行 兒童敎育 最難 此是住民之苦痛也 故李松岡 地方事業念頭十 餘星霜 與部落有志 朝夕協議 終得成功矣 檀紀 4285年 9月 12日字 白池水利組合誕生 4288年 造船通行渡船創造時 組合工事請員業 張時權氏 特有補助 而學校移建時 請員業 金稷煥 張時權 兩氏 補助 而白池水利組合 改稱永沃創設時 民議院 申珏休氏 李宰燮氏 創設委員長 李泰洙氏外 辛尙寅 深川擴張地區功勞人 梁世煥其他諸氏協助 而議員物心兩面人 朴在夏外 朴泳春 朴泳尹 朴泳喜 朴泳憲 高在憲 李德洙 高琪憲 田靑龍外 金順澤 渡船創設議員中 前記水組議員側 不必 再錄 高翊憲 高光順 金諸星 金秉喆 朴点鳳 朴泳漠 金園鐸 崔福憲諸氏 無限勞力誠心誠意 事業 吉功矣 前民議員 申珏休 前組合長 李松岡 兩氏 多大之努力 謨事成功 楚漠時 張良 三國時 諸葛 亮 洽似矣 年年早乾 農土水源 滿足 交通渡船 便利 兒童敎育 安定 側地方住民 李泰洙氏 血誠功 勞 世世不忘 頌德千秋 名聲一崖石文 檀紀 4299年 丙午 淸和前典信又叅奉晉州姜氏斗聲 撰 白池渡船稧一同建立 任員 朴泳瑞 高鉉奭 朴文植 李憲洙 宋一榮 朴泳宇 姜泰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