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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동 장수바위(壯岩洞 將帥바위) 본문

통합청주시/서원구(西原區)

장암동 장수바위(壯岩洞 將帥바위)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1. 8. 28. 08:40

 

 

 

 

 

 

 

 

 

 

 

 

 

 

 

 

 

 

장수바위(장바위)에 대하여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장암동에 있는 바위.

장수(將帥)바위’는 조선 영조장암리 노씨(盧氏)의 조상인 노긍(盧兢)이라는 장수가 근처에 살았다는 전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으나,

단순히 외관상 우람하게 큰 바위에 붙여진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장바위’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장’은 將 또는 長을 뜻할 것으로 추정되나,

장암동(壯岩洞)이라는 지명에서는 壯으로 쓰고 있다. 

옛날에 바위 속에서 장수가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또는 넓은 바위에 장수 발자국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으나 신빙성이 없다.

장수바위’는 바위가 장수처럼 크고 우람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장수바위 근처에 있는 산 또한 같은 명칭을 쓴다.

기자신앙(祈子信仰)으로도 사용되고 있으며 지금도 치성흔적이 있다


상당구 장암동방축말 방죽 옆의 개울가에 있는 높이 4m, 둘레 10m의 큰 바위를 일컫는 이름으로서,

이 바위 앞을 흐르는 개울물은 동쪽으로 흘러 무심천(無心川)과 합류한다.

 

장암동(壯岩洞)에 대하여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산미분장동에 속하는 법정동이다.

장암(壯岩)방축말방죽 옆의 개울가에 있는 높이 4m, 둘레 10m의 큰 바위인 ‘장수(將帥)바위’ 혹은 ‘장바위’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장바위’의 ‘장’은 將 또는 長을 뜻할 것으로 추정되나, 여기서는 壯으로 쓰고 있다.


본래 청주군(淸州郡) 남일하면(南一下面)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가암리(佳岩里), 용평리(龍坪里), 송산리(松山里), 신목리(新木里)각 일부를 병합하여 장암리(壯岩里)라 명명하고 남일면(南一面)에 편입하였다. 1990년에 장암동(壯岩洞)으로 개칭하여 청주시 산·미·분·장동(행정동)에 편입되었다.


이 동의 동쪽으로는 무심천(無心川)이 흐르며, 용평들이라는 범람원이 형성되어 논농사가 활발하다. 서쪽으로는 낮은 구릉성 산지(160m)가 있으며, 산지의 개울물은 동쪽으로 흘러 무심천(無心川)과 합류하며, 일부는 방축말방죽에 저장된다.

시의 남부 끝에 위치하여 청원군 가중리와 접하며, 동쪽 무심천(無心川) 너머로는 평촌동지북동과 접한다. 서쪽에는 청원군 양촌리와 산지를 사이에 두고 접하며,북쪽으로는 장성동분평동과 접한다. 교통로는 청남로(17번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미평에서 남동 방향으로 향하는 미장남로가 나오며,이 길을 따라가면 장성동을 지나 장암동에 이르게 된다. 장암동 북단으로 지나는 제2순환로에서도 쉽게 진입할 수 있다.




 

 

 

노긍(盧兢)에 대하여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교하(交河)이며, 초자는 신중(愼仲), 자는 여림(如林), 호는 한원(漢源)이다. 아버지는 진사 노명흠(盧命欽)이다.


영조(英祖) 때 영의정이었던 홍봉한이 청주목사로 재직할 당시인 1742년(영조 18)에 실시된 청주 백일장에서 6살의 나이로 장원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홍씨 일문의 자손들과 교유하게 되었다. 1765년 진사가 되었는데, 과시에서 명성을 떨쳐 호서지방 사류들의 추앙을 받았다.

향중 자제를 모아 강학을 하는 한편 시문에 능하여 관직에는 큰 뜻을 품지 않았다.

1777년(정조 1) 사간 이현영(李顯永)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여론을 조성, 사풍(士風)을 어지럽히는 인물이라 하여 경중(京中)의 고봉환(高鳳煥), 개성이환룡(李煥龍), 호남이행휘(李行輝) 등과 함께 먼 변방에 유배시킬 것을 상소하자, 이로 인하여 위원(渭原)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만년에는 효로써 모범을 보였고, 부자가 모두 과시(科試)로 이름을 떨쳤다.


한문소설「화사(花史)」를 지었다. 문집으로 『한원집(漢源集)』이 있다. 그 외 시가 도처에 전하고 있다.

 

노긍이 학문을 익히며 책을 말린 바위라 하여 폭서암이라고도 한다

장바위에는 노긍의 호인 한원노선생(漢源盧先生)이라는 글과 폭서암(曝書巖)이라는 글이 음각되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