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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도면 하석리현암사(賢都面 下石里懸巖寺) 본문
현암사(懸岩寺,見佛寺)는 청원군 현도면 하석리 구룡산에 위치한 조계종 사찰이다.
남쪽으로 정상부 가까운 암벽에 의지하여 세웠다
대청댐 관리사무소옆에 위치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현암사 안내판을 보면
급경사 계단길을 약 200여미터 숨차게 올라야 한다
창건연대를 알려주는 문헌기록은 없고 전설로만 전해지고 있는데
백제 전지왕 3년(406)에 달솔해충(達率解忠)의 발원으로 고구려의 승려 청원선경(淸遠仙境) 대사가 개산초창(開山初創) 하였고
이 후 통일신라 문무왕5년(665) 원효대사가 중창하였다고 하는데 이때에 창건설화와 중창설화가 전해온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찰기록에서 처럼 명확한 사료에 근거한것은 아니다
청원선경대사가 절터를 찾기위해 한겨울에 눈쌓인 구룡산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지금의 절터에 이르자 한마리의 노루가 자고 있다가 청원스님을 보자 반갑다는 듯 세번 절을 하고 산으로 달아났는데
노루가 누워있던 자리를 가만히 살펴보니 눈은 없고 그자리에 맑은 영천수(靈泉水)가 흐르고 있었다.
이에 청원선경대사는 산정상부에 샘물이 흐르는것도 신기할뿐 아니라물이 있으면 사람이 살수있고 따라서 이 곳이 좋은 수도도량터임을 간파하고
절을 창건하니 바로 지금의 현암사 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절터는 산허리에 자리잡아 좌우로 아늑리 감싸주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절은 산꼭대기에 올라 앉아있어 마치 용의 등을 타고 있는 연소혈 형상을 띠고있더 만인의 도량이 되기보다는
소수의 도인이 수도하는 도량일수밖에 없다는것이다
한때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보림수도할 때 절이 위치해 있는 산의 줄기가 아홉줄기로 강물에 뻗어있다고 하여 구룡산이라 하였고,
또 절이 절벽에 매달려있는 암자라 해서 현암사(懸巖寺)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또한 현암사의 대응보전은 구룡산 청룡날(등)에 위치한 형국이므로, 천년후 청룡날 앞에 세 개의 호수가 이룩되어 용이 물을 만나게 되면
구룡산이 국토의 중심이 된고 현암사에서 불법이 흥하게 된다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전에는 현암사의 한 모퉁이에 삼호루라는 편액이 걸린 누각이 전해 왔었다고 한다.
호수가 조성되면 구룡산 청룡날 앞에 임금왕자 지형이 되어 국왕이 거주하게 될 것이며,
석탑의그림자가 삼호에 비추면 국운이 융성하고 사찰도 번창할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절을 우측으로 조금만 돌아가면 대청호가 훤하게 조망되는 자리에 1990년에 세운 오층석탑이 대청호를 바라보며 우뚝 솟아 있다.
본래 현암사가 위치한 구룡산은 청원군 현도면과 문의면의 경계지역으로 본래 삼국시대에는 감국의 변방지대로서 전투가 끊이지 않던 곳이다.
절 뒷편의 신축한 5층석탑을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정상부위에 아직도 석성의 잔재가 남아 있어 당시의 격전지였던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은 누군가 쌓아놓은 작은 돌탑들이 무리지어 지나는 이들을 반기고 있다.
구룡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직선거리 4km지점에는 문의문화재단지의 건너로 복두산성과 양성산성이 위치해 있다.
삼호는 지명으로도 나타나는데, 대청호 보조댐이 있는 곳이 용호, 대청호가 미호,청남대가 있는 곳이 황호러 불러지고 있다.
한편 구룡산 청룡날 바로앞 댐 건너편 야트막한 향로봉에는 임진왜란시 이여송장군과 관련한 이야기사 전해 내려온다.
이여송이 조선땅에 인재가 많이 날것을 두려워해 국토 곳곳에 혈을 박아 정기를 끊었는데 향로봉에 이르러보니 구룡산의 정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기를 끊고자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갑자기 구룡산 현암사에서 운무가 일고 신비로운 서광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땅에 꽃혔다.
놀란 이여송이 일관에게 물어보니 구룡산이 노하여 장차 우리 군사의 안위가 염려된다고 하였다.
이에 놀란 이여송은 곧바로 향로봉에 제단을 마련하고 향불을 피우며 구룡산 산신에게 무사히 귀환하기를 기도했다고 하여
그 이후로부터 향로봉이라 불리워지게 되었고 구룡산은 혈을 찔리는 비운을 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조선 정조 7년(1783년)에는 시환대사의 중창을 거쳐 법등을 이어오다가 어느 때인가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8년 불자 김사익의 발원으로 당지 동인화상이 재건하여 면면히 이어오다가 78년 종현 스님과 84년 도공 스님에 이르러 삼성각, 대웅보전 등 불사를 일으켜
현재의 일신한 도량의 모습을 갖추게 되있다.
이렇듯 현암사에 관한 정사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초의 『동국여지승람』에는 견불사라 하였다가 말기에 가면서현사라는 별칭을 부가하고 있다.
현사란 이절의 속칭인 '다람절'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후에는 다시 현암사로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지도서』와 『충청도읍지』의 문의현 지도에는 견불사로 나타나 있고, 『호서읍지』의 문의현지도에는 현사로 표시되었으며,
필사본으로된 『문의읍지』에 수록되어 있는 지도에는 '懸寺(見佛寺)'로 명시하였는데 그 위치는 오늘의 현암사 위치와 똑같은 형각진 북쪽에 있다.
이상의 기록으로 현암사는 '見佛寺→懸寺→懸岩寺'로 절이름이 변천되어 왔음을 알 수있다.
규장각에 소장하고 있는 문의읍지의 형승조에는 견불사 즉 현암사의 경치에 대하여 "견불사는 문의현 남쪽 10리 현도산의 꼭대기에 자리한다.
지금 그 터에는 바위 위에 지은 초가집 한 채만 있는데,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전에는 처마를 잇댄 건물이 여러 칸 있었다고 하므로 전날의 형세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위치는 형각진에 있다‥‥‥"고 하였으며 필사본 문의읍지에는 현사임강이라고 하였다.
현암사의 현존건물은 1988년에 중건된 정면 3간, 측면 2간의 대웅보전과 역시 정면 3간, 측면 2간의 용 화전, 그리고 1940년대와 1980년대 초에 각각 건립된 산신각과 요사가 있는데 1평 규모의 산신각이 있던 자리에는 1987년 무렵 현재의 삼성각으로 규모를 넓혀 중찬하여 안에는 1992년 조성한 산신도, 칠성도, 독성도를 봉안하였다.
요사는 콘크리트 건물로 2층은 종루로 되어 최근에 제작한 대형의 동종이 걸려 있다.
이 동종이 구룡산을 울리고 멀리 대청호반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두고 바라 문의팔경 가운데 하나인 현대판 '현사모종' 혹은 '현사만종'이라 하겠다.
유물로는 용화전 안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과 산신각 뒤편에 있는 석종형 부도가 있으면 절터에서는 고려에서 조선조에 이르는 각종의 토기편·자기편과 와편이 다량으로 발견되고 있다.
석조여래좌상은 용화전 안에 안치되어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백제 때 선경대사가 자연돌출석에 조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불상의 조각양식으로 보아 고려 말기 냊지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광배와 대좌는 모두 결실되고 불신만 남아 있는데 경가부좌한 모습으로 머리는 나발이고 그 위에 육계가 큼직하게 마련되어 있다.
얼굴은 둥글고 넓은 편이며 전체적으로 조각수법이 정교하지 못하다.
수인은 무릎 위에서 양손을 잡은 선정인이며 법의는 통견으로 옷주름이 거의 표현되지 않았다.
불상의 크기는 전체높이 110cm, 머리 높이 43cm이다.
한편 용화전 좌측의 삼성각 을 지나 좌측 산길을 조금만 오르면 원당형 부도 1기가 전하고 있다.
어느 스님의 부도인지 그 유래는 전혀 알 수 없다.
8각의 지대석 위에 2단의 하대석을 올리고 그 위에 탑신을 올렸다.
하대석은 1매석으로 조성하였으며 위에 연꽃 무늬를 조각한 괴임을 마련하고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은 석종형으로 기와골을 만들어 정성을 들인 흔적을 보이며 상륜부는 연꽃 봉우리 모양으로 장식하였다.
부도의 크기는 전체 높이 144cm, 탑신 높이 60cm, 둘레 210cm이다.
한편 미혈과 풍혈에 관한 불가사의한 이야기도 전하여 온다. 고려시대 광종(950~975) 때 화진법사가 주지로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해 겨울 폭설로 인해 그야말로 '천산조비절 만경인종멸'의 설경으로 변해 버렸다.
하루하루 시주로 연명하던 화진대사와 사미승은 생가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남아 있는 알곡이 바닥을 드러낸 지 5일이 넘자 사미승이 먼저 쓰러지고 이어 화진대사도 가물가물 죽음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그때 은은한 목소리가 법당을 울리며
"그대가 이렇게 허기에 시달릴 줄은 몰랐도다. 더욱이 사미승과 법사가 같이 혼절해 있으니 정차 이절의 보전조차 헤아리기가 어렵게 되었구나.
내가 그대들의 갸륵한 정성을 외면하고 돌아설 수는 없느니라. 서둘러 일어나 산신각 뒤로 가서 바위문을 열어보도록 하라.
끼니거리와 공양미 정도는 얻어 쓸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탐심은 금물이니 명심하여 그 쌀을 최소한 요긴한 데만 가려 쓰도록 하라."
화진대사가 기진맥진한 채로 눈굴을 뚫어 산신각 뒷편에 이르렀으나 바위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때 투실투실한 새앙쥐 몇 마리가 돌 틈새를 가로질러 도망하는 것이었다.
과연 그곳에 있는 작은 돌멩이를 빼네자 두 사발 정도의 흰쌀이 흘러내려 법사와 사미승은 끼니를 잇게 되었다.
법사는 그 미혈(米穴)에서는 두 사람분의 쌀과불전에 바필 공양미 이상은 나오지 않으며, 그 이상이 필요할때도 한 사람 몫을 받았다가
구멍을 막고 난 뒤 다시 한 사람 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필요 이상의 제물을 탐하지 말라는 교훈이 전하고 있었던것이다.
사찰안의 궁기가 걷히자 법사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렛동네를 찾아 나선다.
어느세 현암사의 부처님의 자비와 공덕이 내리는 영험한 절로 사방에 이름이 퍼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제국수행을 하던 10여명의 스님들이 청주근방을 지나다 현암사를 찾아 들었다
사미승은 미혈로 부터 공양할 쌀을 일인분 받고 있자니 여간 짜증스러운것이 아니였다
화가나자 사미승은 부억으로 가 긴 쇠부지깽이를 들고 미혈을 사정없이 후벼파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굉음과 함께 연기가 자욱하게 퍼졌다
매케한 연기에 사미승은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서 쓰러지게 되였고
그 후로는 쌀대신 차디찬 바람이 불어나와 한여름 산사를 찾는 사람들에게 시원함을 안겨주다가
그것마저 그치고 어느때서 부터인가 지금처럼 물이 흘러나오게 되였다는 것이다.
흔히 미혈의 고사가 전하는 절은 폐사로 이어지기가 십상인데 현암사는 그런 단계까지 이르지 않은것이 혹시 면면히 이여온 구룡산의 정기때문이 아닐까 여겨진다
조선영조20년(1744)에 기노사사건(耆老社事件)으로 남해도로 귀향가던 박성원이 문의를 지나는 도중에 현암사를 보고 지은 [文義道中見懸寺]란 제목의
칠언율시가 그의 남해유배일기에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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