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불정면 외령리정인지묘소(佛頂面 外嶺里鄭麟趾墓所)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불정면 외령리정인지묘소(佛頂面 外嶺里鄭麟趾墓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1. 10. 20. 08:53

 

 

 

 

 

 

 

 

 

 

 

 

 

 

 

 

 

 

 

 

 

 

 

 

 

불정면 외령리에 위치한 정인지의 묘소이다

정인지는 세종~문종 대에 걸쳐 한글창제 및 역사·천문·역법·아악 등 각종 제도정비에 기여했다.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저(伯雎), 호는 학역재(學易齋).

아버지는 석성현감 흥인(興仁)이며, 어머니는 진천의(陳千義)의 딸이다.

권우(權遇)의 문인이며, 1414년(태종 14) 식년문과에 장원급제, 예빈시주부·감찰·예조좌랑·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세종이 즉위한 뒤 집현전응교로 등용되어 세종의 집현전 융성책에 맞추어 큰 활약을 했다.

1425년(세종 7) 문과중시에 장원하여 집현전직제학이 되었다. 다음해 세종의 경연관을 지냈다.

1430년 우군동지총제, 다음해 대제학을 거쳐 예문관제학·동지춘추관사·인수부윤·이조참판·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1436년 부친상으로 사직했으나 이듬해 기복(起復)되었다. 형조참판과 형조판서를 거쳐 1440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43년 지중추원사, 1447년 이조판서·지춘추관사, 1450년(문종 즉위)에는 좌참찬이 되었다.

그러나 문종에서 단종 대에는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의 세력에 밀려 정치적 입지가 많이 위축되었다.

1453년 판중추부사로 있으면서 수양대군에 협조하여 계유정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좌의정으로 발탁되었으며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으로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책봉되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한 후에는 영의정부사로 승진되고 좌익공신(左翼功臣)에 책봉되었다.

1458년 세조의 불서간행에 반대하여 부여로 부처(付處)되기도 했으나 곧 복직되었다.

1465년 70세로 치사를 원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고 궤장(几杖)을 내렸다.

1468년(예종 즉위)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이 되었고,

성종 즉위를 전후하여 원상(院相)에 임명되고 경연영사(經筵領事)가 되었다.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봉되었다.

1478년 성종이 그를 왕사(王師)로 선발하자 대간들이 그의 재산을 문제삼아 이의를 제기했다.

성종은 대간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그해 죽어 왕사로 봉해지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