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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남면 조촌리 최세면효행비(遠南面 助村里 崔世冕 孝行碑) 본문
최세면은 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이다.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주백(周伯). 사과 최두수(崔斗壽)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동중추 최덕립(崔德立)이다. 아버지는 서부참봉 최기선(崔起先), 어머니는 진천임씨(鎭川林氏)로 임대성(林大誠)의 딸인데, 외할아버지는 판관 임수무(林秀茂)이다.
부인은 안동권씨로 권서(權澨)의 딸인데 자식 하나를 두었으며, 부인 단양우씨(丹陽禹氏)는 진사 우필량(禹弼亮)의 딸로 여섯 자식을 두었다. 아들은 최익륭(崔益隆), 최익홍(崔益弘), 최익명(崔益明), 최익성(崔益成), 최익장(崔益章), 최익흥(崔益興), 최익중(崔益重)을 두었다.
[활동사항]
최세면은 천성이 침착하고 경망하지 않아 견문과 학식, 도량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말은 무겁고 행동거지는 떳떳하였다. 최세면은 효를 하늘에 심은 듯하였으며, 가세가 빈곤하여도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모양 없이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일부러 자기 몸을 상해가면서 스스로 농사일을 하였다.
1668년(현종 9) 겨울에 어머니 진천임씨가 병환이 있더니, 이듬해 봄에는 안성(安城) 객지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최세면은 주야로 끊임없이 통곡하였으며, 생시에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함을 슬퍼하였다. 가세가 빈곤하여 가족 중에 경기도사로 있는 사람과, 고을 군수 김안우(金安佑)가 협조하여 장례를 마쳤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06년(숙종 32)에 정려를 받았고, 아버지 최기선(崔起先)에게는 장악원정(掌樂院正)이 증직되었고, 최세면에게는 호조참의가 증직되었다. 1899년(고종 36)에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에 ‘인효려(仁孝閭)’를 창건하고, 의정부참찬관 최유경(崔有慶), 증호조참의 최세면(崔世冕), 두 아들 통덕랑 최익명(崔益明)과 증동몽교관 최익성(崔益成)을 봉안하였다. 정인표(鄭寅杓)가 효행비문(孝行碑文)을 찬술하였다.
공이 묘 옆에 초려(草廬) 하나를 짓고 시묘살이하던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 문수봉 아래 동산(東山)에 있던 초려는 그 후 초당(草堂)이라 불러와 『읍지(邑誌)』에 전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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