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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면 용방리 옥천경현당(伊院面 龍坊里 沃川景賢堂)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이원면 용방리 옥천경현당(伊院面 龍坊里 沃川景賢堂)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2. 2. 10. 07:19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구룡 마을 금강가 산기슭에 위치한 용문영당은 최초에는 구룡촌의 곽, 홍, 송씨가 창건한 용문서당인데 이곳에서 출생한 우암 송시열선생이 소년시절 학문을 닦은 유서깊은 곳이기도 하다. 그 후 1650년 송우암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옥천에 내려와 용문서당을 다시 세우고 경현당이라 이름짓고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송우암 선생이 돌아가신 후 1697년 숙종 23년에 우암 선생의 영정을 이곳에 봉안하고 용문영당이라 하였는데 1871년 고종 8년에 훼철되었다가 그 후 다시 세우고 영정을 봉안하게 되었다.

건물의 규모는 목조기와집으로 정면 여섯칸, 측면 두칸반, 맞배집으로 방이 한칸이고 나머지는 대청으로 되어 있다. 현재도 영당안에는 우암선생의 영정이 보존되어 오고 있는데, 상반신만을 그린 70세 이후의 모습이다. 영정은 비단에 엷은 채색으로 그렸으며 머리에 복건을 하였고, 옷은 흰베로 소매를 넓게 만들어 비단으로 그 가를 두른 심의를 입었다. 그림의 상·하면에는 아무런 글씨가 없어 그림을 그린 화공의 이름과 연대를 알 수 없다.[옥천문화원]

 

현재는 접근이 그리 쉽지 않은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영정도 다른곳에 보관하고 있는지 찾을수가 없다

대부분의 문화재 관리에 대한 지식과 이해 부족등으로 경현당도 많이 쇠락되여 있었다

경현당을 찾을수 있는 이정표등도 필요한 곳이다

자꾸만 흐르는 세월속으로 조금씩 사라지는 엤 자취와건물들이 무척이나 안스럽게 생각이든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58호로 지정 관리되고있다.

 

 

용방리는 옥천군 이내면(利內面) 칠방리(漆坊里)와 구룡리(九龍里)를 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1739년 기록에는 칠방리에 24호 구룡리에 50호가 살았으며 1891년 기록에는 칠방리에 23호 구룡리에 51호가 살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을 일제히 조정할 때 이내면(伊內面) 이라 하며 구룡리와 칠방리를 합하여 용방리(坊里)라 하였다. 그 후 1929년 이남면 이내면을 합하여 이원면이 되었고 용방리도 이에 소속되었다. 2007년말 현재 구룡(九龍) 40호 91명, 칠방(七坊) 84호 177명이 살고 있다.

구룡리는 고려 삼사좌윤을 지내신 곽유원공이 낙향한 이래 웃옻뱅이와 함께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구룡리는 뒷산의 봉우리가 아홉개이며 주령이 마을을 향하여 내려왔기 때문에 아홉 마리의 용이 마을을 향한 형국이라 하여 구룡촌이라 이름 하였다.

이 마을은 우암 송시열선생이 탄생한 곳이며 우암 유허비가 있다. 유허비 옆에 곽자방 충신비각이 있다. 구룡촌은 안말, 도랫말, 새터, 갓골, 강건너 도투마리의 다섯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도투마리는 폐촌되어 빈터만 남아 있다. 강가로부터 지겁, 소죽은골, 용문영당, 오국장 묘역, 활량터, 재궁이 있는데 재궁 날망에 밀양 박씨 세장지지가 있고 그 아래 박씨네 재실과 우암선생 생가터가 있다.

마을 뒷산의 중심인 중구봉은 정월 대보름에 달집을 태우고 달마중을 하던 곳이다. 중구봉 너머에 서당골, 큰말 뒤에 큰말 뒤너머, 명상골, 도랫말 뒤넘어, 갓골, 너멍골, 뒤릉골이 있다. 안말 입구에 큰 느티나무가 있다.

옛날에는 세 그루가 있었는데 어미 나무는 화재로 소실되고 동생 나무는 고사하여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았다고 한다. 옛 삼괴정(三槐亭)의 위치를 추적하는 기점이 될 것 같다. 큰 도로에서 마을로 진입하는 곳에 터넘, 여느말, 차돌고개, 동구래 솔밭이 있다. 강건너 철봉산 송골에는 철광석을 채취하던 굴이 남아있고 상수도 취수보가 있는 자리가 방달여울이다.

칠방리는 원래 옻뱅이인데 웃말, 샛골, 벌밭, 아랫말, 모시래, 시누리 등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강건너 시누리는 폐촌되어 빈터만 남아 있고 모시래는 철로와 도로 사이에 있던 집들을 도로 확장공사 때 모두 이전시켜 폐촌 되었다.

웃마을은 선산곽씨(善山郭氏)의 집성촌이고 아랫말은 성주이씨(星州李氏)의 8세조이신 옥천군수를 지낸 이흥노(李興老)공이 터전을 잡은 이래 대를 이어 살고 있다.

마을앞 넓은 들에는 가장골, 왜마루, 숫들, 봇들 등의 이름이 남아있고, 아랫말과 샛골 사이에 호무까가 있는데 옛날 홍병사의 묘가 풀 한포기 없는 황토언덕만 남아있어 홍묘가라 부르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마을뒤 강가를 시무터라 하는데 철봉산 송골에서 철광석을 채굴할 때 철광석을 야적했던 쇠묻이에서 유래된 듯하다. 시무터 강언덕 풍광 좋은 곳에 별장촌이 생겨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옆을 흐르는 산내또랑은 장찬또랑과 합류하여 금강으로 유입된다. 아랫말 서쪽의 작은 동산을 옻방메 또는 개구리봉이라 부른다. 건진리에서 길게 동으로 뻗어 나온 산을 고바우, 또는 뱀날이라 부르는데 일봉산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다.

윗말 뒤에는 상수도사업소, 아랫말 갯밭에는 옥천학생야영장이 생겨 휴양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