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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면 이원리 이산당(伊院面 伊院里 伊山堂) 본문
이정구(李廷龜) : 명종19년(1564)∼인조13년(1635)
『한경지략』 각동(各洞) 의 관동(館洞)을 보면 “ 관동(館洞)은 성균관이 있어 생긴 이름으로 이곳에 월사 이정구가 살던 집이 있는데 봉사손이 대대로 살고 있다.” 고 하였다. 월사(月沙) 이정구가 살던 곳은 성균관 근처인 관동(館洞)으로 현재의 종로구 명륜동3가이다.
세조 때의 명신인 이석형(李石亨)의 현손이며 아버지는 현령 이계(李啓)이고, 어머니는 현감 김표(金彪)의 딸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字)는 성징(聖徵)이며 호는 월사(月沙) · 보만당(保晩堂) · 치암(癡菴) · 추애(秋崖) · 습정(習靜)이다. 신흠, 장유, 이식과 함께 조선 중기의 4대 문장가로 일컫는다.
이정귀는 유년시절부터 남다른 문학적 자질을 보이기 시작해 8세에 벌써 한유(韓愈)의 「남산시(南山詩)」를 차운(次韻)했다고 전한다.
선조10년(1577) 14세 때에 승보시(陞補試) 사학(四學)의 유생들을 상대로 시험을 보여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주는 시험
에 장원을 하며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고 선조18년(1585) 22세에 진사가 되고 5년 뒤인 선조23년(159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추천을 받아 사관(史官)이 되었다.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을 만나 임금이 서쪽으로 피난하였는데 당시 이정귀는 상(喪)을 당하였으나 미처 염습(殮襲)을 하지도 못한 채 행재소로 뒤쫓아 가 성천(成川)에 도착하니, 세자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에 임명되었다.
선조26년(1593) 명나라의 사신 송응창(宋應昌)을 만나 『대학』을 강론해 그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것은 후에 『대학강어(大學講語)』로 간행됐다. 사서(司書)로 승진하였다가 병조좌랑으로 전직하였고 또 이조좌랑으로 전직하였다.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으로 누차 불렀으나 문서를 관리하고 중국말을 잘 한다고 하여 지방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선조30년(1597) 한양으로 돌아온 뒤 병조정랑에 임명되고 승문원 교리(校理) 한학교수(漢學敎授)를 겸하였다. 명나라 제독을 따라다니며 문서 관리 등을 도왔고 성균관 사예(司藝)로 또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겸임하였다.중국어에 능통하여 임금이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도록 하자 걸맞은 직책으로 승진시키라고 명하여 낭관(郎官)의 품계에서 하루 사이에 7등급을 뛰어올라 3품에 이르렀는데, 이는 대체로 특별한 은총이었다.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일찍이 며칠간 병가를 냈을 때 임금이 ‘이정귀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어보고, 특별히 내구마(內廐馬)와 말 장식을 하사하여 포상하였다. 선조31년(1598) 가을에 명나라 주사(主事) 정응태(鄭應泰)가 황제에게 어사 양호(楊鎬)를 모함하였는데, 선조(宣祖)가 양어사의 모함을 밝혀주었다. 그러자 정응태가 우리나라에 앙심을 품어 조선이 왜와 손잡고 명나라를 침범하려 한다고 허위로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조선에서는 이를 해명하고자 이항복을 상사(上使)로 삼고 임금이 “ 외교 무대에서 하는 말에는 이정구를 능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이정구를 가선대부 공조참판으로 승진시켜 부사(副使)로 삼았다. 중국 연경(燕京)에 도착하여 이정구가 쓴 주문(奏文)을 올리니 명나라 조정에서 심의하여 “조선의 주문(奏文)이 명백하고 통쾌하여 읽을 때 눈물이 떨어지려고 하였습니다.”고 하니, 황제가 하교하기를, “정응태가 사적인 분노로 인해 망령되이 비방하였으니 돌아와 심문을 받도록 하라. 그리고 조선을 위로하여 그들로 하여 금 짐이 시종 보살펴주는 덕의(德意)를 알도록 하라.”고 하였다.
돌아와 보고하니,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노비와 토지를 하사하고 거듭 한 품계를 승진시켰다. 호조참판에 임명되고 특별히 예문관 제학(提學)에 임명되었고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임하였다. 호조판서의 자리가 비게 되자 임금의 뜻이 이정구에게 있었으므로 이내 품계가 승진되어 호조판서로 승진되었다.
그때 마침 왕비의 상을 당하여 국장도감 제조(提調)를 겸임하였다.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임하고 예조판서로 전직되었는데, 원래 겸임하였던 국장도감 제조는 그대로 하였다. 국장이 끝나자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을 겸임하였다. 이어 홍문관 대제학 · 예문관 대제학 ·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임하게 되어 누차 상소를 올려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외직을 요청하여 경기 관찰사로 나갔는데, 공무를 본 지 몇 달 만에 적체된 일들이 씻은 듯이 처리되었다. 녹봉을 떼어내어 숭의전(崇義殿)을 수리하고 왕씨(王氏)의 후손을 찾아 옛날처럼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죽주(竹州)ㆍ수원(水源) 산성을 수축한 다음 군량과 병기를 비축하여 방어를 공고히 하고 아울러 기문(記文)을 저술하여 후일에도 폐지되지 않도록 하였다.
임기가 차자 중추부를 맡았고 아울러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ㆍ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겸임하였다. 선조41년(1608) 선조(宣祖)가 승하하였을 때 국장도감 제조(提調)가 되어 일을 매끄럽게 처리하였고 다시 세자빈객과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ㆍ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겸임하였다. 재차 대제학을 겸임하게 되어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관직을 사양하여 전후 일곱 번 고하여 비로소 체차되었다. 실록청의 부총재(副摠裁)로 <선조실록>을 편찬하고 나서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자주 대례(大禮)를 치렀다고 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되었다. 이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가 형조판서로 전직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대신의 추천을 받아 다시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1623 3월 인조반정(反正)이 있던 날 밤 사자(使者) 서너 명이 찾아오자 편지를 써서 대장(大將) 이귀(李貴)에게 보내어 행사를 체모가 있게 하라고 권하였다. 천천히 대궐 앞으로 나가 교지를 받들고 서궁으로 나아가 대비에게 복위(復位)할 것을 청한 다음에 백관을 소집하여 즉위하고 대신을 보내어 태묘(太廟)에 고하도록 하였다.
반정 후 또 예조판서가 되었고 얼마 안 되어 지경연사(知經筵事)ㆍ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하였다. 이윽고 좌찬성(左贊成)에 임명되어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하였다. 책봉조사(冊封詔使) 왕민정(王敏政)ㆍ호양보(胡良輔) 가 중국에서 오니 이정구를 접대를 담당하는 책임자로 명하자, 누차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업무가 많은 의금부(義禁府)의 직책만 체차하였다.
명을 받아 황화집(皇華集) 서문을 저술하고 문선왕묘비문(文宣王廟碑文)을 쓰고 태묘(太廟)의 악장(樂章)을 정하였다. 다시 찬성(贊成)으로 돌아와 그대로 예조 판서를 겸하였는데, 이는 모두 특별히 명한 것이었다.그 이듬해 정월에 청(淸)나라 기병(騎兵) 수만이 침략하여 들어와 평산(平山)에 이르니, 병조판서를 겸하도록 명하였다. 어가(御駕)를 호위하고 강도(江都)로 들어가니, 청나라가 누차 서신을 보내어 맹약(盟約)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정구가 서쪽 교외에서 맹약을 체결하니, 청나라 군대가 돌아갔다.어가를 호위하고 도성으로 돌아와 병으로 여러 번 사직하기를 원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어의(御醫)를 보내어 약제를 하사하였고 세자도 여러 번 궁관(宮官)을 보내어 문병하였다. 그때 의주에 주둔한 청나라 병력이 아직도 다 철수하지 않았는데, 이정구가 명을 받아 그들을 설득하니, 곧바로 철수 하였다.
그 이듬해 7월에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이어 좌의정으로 승진하여 세자부(世子傅)를 겸하였다. 인목왕후의 상에 총호사(摠護使)가 되어 산릉(山陵)에 이르렀다가 병환이 심하여 집으로 돌아왔는데, 의원과 병을 묻는 관원이 번갈아 왕래하였다. 급히 면직해 달라는 상소를 열두 번 올리니, 임금이 측근의 신하를 보내어 위로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임명하였다.
인조13년(1635) 4월 29일에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72세였다. 세자는 친히 찾아가 조문하고 사대부는 친척처럼 곡하였다.중국문인들의 요청에 의하여 100여 장(章)의 『조천기행록(朝天紀行錄)』을 간행하기도 했다. 시문집으로는 그의 문인인 최유해(崔有海)가 편간한 『월사집(月沙集)』 68권 22책이 전한다.
이원면 이원리에 위치한 이산당이다
관리부족으로 많이 쇠락되여 가는 모습이다
마당에 위치한 공적비로 보아 연안이씨문중과 관련된 건물인 듯 하다.
연안인 월사 이정구 선생의 문집판목을 보관하던 장판각 건물이다.
이원리는 원래 옥천군 이내면(利內面) 현리(縣里)와 역리(驛里)가 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1739년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이내면 현리라 하여 106호, 역리에 41호가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1891년 신묘장적(辛卯帳籍)에는 현리 64호, 역리 61호가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을 전면적으로 조정하면서 면의 이름을 이내면(伊內面)으로 고치고 현리와 역리가 합하여 이원리가 되었다. 2007년말 현재 현남에 29호 52명, 현리에 78호 202명, 두암에 29호 71명이 살고 있다. 1929년 이남면과 이내면이 합하여 이원면이 되면서 이 마을이 면소재지가 되었다.
이원리가 된 것은 현리는 이내면의 소재지였기에 이내면(伊內面)의 이(伊)자와 역말에 토파역(土坡驛)과 우현원(牛峴院)이 있었는데 우현원의 원(院)자를 따서 이원리가 되었다. 현리(縣里)라 함은 신라초에는 소리산현(所利山縣) 이었고 경덕왕 이후부터 고려 때 까지는 이산현(利山縣) 이었으며 바로 이 마을이 현의 소재지였기 때문에 현리라 불러왔다.
현리는 대밭말, 선말, 장터로 구분 되는데 옛장이 있던 곳이므로 구장터라고 부른다. 대밭말 뒤쪽 성재산 남쪽기슭에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선생의 문집 판목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있는데 1986년에 자손들이 그 판각을 모두 경기도로 옮겨서 빈 집만 남아있다.
대밭말과 장터 사이에 창주서원지가 있는데 서원은 훼철되고 묘정비만 남아 있다. 묘정비의 비문이 마모되어 판독이 어렵다. 1998년 안남면 도농리에 조헌선생의 표충사를 다시 짓고 신도비에 비각을 세울 때 이 묘정비에도 비각을 세우고 주변에 잔디밭을 조성하였다.
선말은 선바위가 있는 마을이다. 다리골 입구 냇가에 서 있는 이 바위는 온 주민이 신성시하는 바위이다. 주변에 콘크리트로 치장을 한 것이 눈에 거슬린다.
역말은 역리라고도 불렀는데 이곳에 토파역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 현남(縣南)이라 불리기도 한다.
두암은 말바우란 옛말을 한자화 할 때 말두(斗)자와 바위 암(岩)자를 써서 두암이라 하였는데 사실은 이곳에 백촌 김문기(白村 金文起) 선생의 별장인 마암계당(馬巖溪堂)이 있어 마암을 ‘말바우’라 부르게 되었는데 한자화 할 때 말 마(馬)가 아닌 말두(斗)자로 쓰게 되어 두암리가 되었다. 두암리에는 충청북도유형문화재 120호로 지정 받은 삼층석탑이 있다. 영동군과 경계지점인 월이산에 봉수지가 있어 옛날 영동군 용산면에 위치한 박달라산에서 받아 군북면 환산의 봉수대로의 통신을 담당하였다. 현리소류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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