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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면 용방리 곽자방충신각(伊院面 龍坊里 郭自防忠臣閣)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이원면 용방리 곽자방충신각(伊院面 龍坊里 郭自防忠臣閣)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2. 2. 12. 08:52

 

 

 

 

 

 

 

 

 

 

 

 

 

 

 

 

 

 

 

송우암 유허비 옆에 있다

우암 송시열의 외할아버지이다

우암 송시열은 1607년 음력 11월 12일 조선 충청북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에서 사옹원 주부를 지낸 은진 송씨 송갑조와 곽자방의 딸 선산곽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안동대도호부사 송여해(宋汝諧)의 후손으로 증조부 송구수(宋龜壽)는 영경전참봉(永慶殿參奉)·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을 역임하였으나 효성이 지극하여 이름이 높았다. 그의 가계는 대대로 서인이었으나, 그의 5대 방조 송세충(宋世忠)의 손자 송응개(宋應漑), 송응형(宋應泂)은 동인이 되었다. 같은 충청남도 출신으로 함께 김장생김집의 제자가 된 송준길 역시 그의 먼 친척으로 13촌이 된다.

 

곽자방의 다른 딸이자 그의 이모는 한산이씨 이덕렴과 결혼하였다. 또한 송시열의 조부와 송준길의 조부는 이윤경의 딸을 아내로 맞아 동서가 되었다. 그래서 송시열과 송준길은 가계상 13촌이지만 진외가 쪽으로는 6촌 재종간이다. 나이 한살 위인 송준길을 송시열은 13촌 숙으로가 아니고 재종형으로 늘 춘형이라 불렀다.

 

이후 어머니 곽씨 사후 아버지 송갑조는 지씨 부인을 계모로 맞이하였고, 서모로 고성이씨 부인을 들이게 된다. 송시열은 후일 자신의 서모가 이괄의 친척인 관계로 서모의 친정 일가가 화를 입게 되자, 특별히 배려하여 서모의 일가를 대전근처로 피신시키기도 한다.[4] 서모와 서자를 차별하는 조선사회와 달리 그는 서모와 서자, 서녀, 그리고 친척의 서자, 서녀들도 존중하고 깎듯이 예의를 다하였다. 그러나 서자, 서녀들에게 정통성과 가계 계승권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용방리는 옥천군 이내면(利內面) 칠방리(漆坊里)와 구룡리(九龍里)를 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1739년 기록에는 칠방리에 24호 구룡리에 50호가 살았으며 1891년 기록에는 칠방리에 23호 구룡리에 51호가 살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을 일제히 조정할 때 이내면(伊內面) 이라 하며 구룡리와 칠방리를 합하여 용방리(龍坊里)라 하였다. 그 후 1929년 이남면 이내면을 합하여 이원면이 되었고 용방리도 이에 소속되었다. 2007년말 현재 구룡(九龍) 40호 91명, 칠방(七坊) 84호 177명이 살고 있다.

구룡리는 고려 삼사좌윤을 지내신 곽유원공이 낙향한 이래 웃옻뱅이와 함께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구룡리는 뒷산의 봉우리가 아홉개이며 주령이 마을을 향하여 내려왔기 때문에 아홉 마리의 용이 마을을 향한 형국이라 하여 구룡촌이라 이름 하였다.

이 마을은 우암 송시열선생이 탄생한 곳이며 우암 유허비가 있다. 유허비 옆에 곽자방 충신비각이 있다. 구룡촌은 안말, 도랫말, 새터, 갓골, 강건너 도투마리의 다섯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도투마리는 폐촌되어 빈터만 남아 있다. 강가로부터 지겁, 소죽은골, 용문영당, 오국장 묘역, 활량터, 재궁이 있는데 재궁 날망에 밀양 박씨 세장지지가 있고 그 아래 박씨네 재실과 우암선생 생가터가 있다.

마을 뒷산의 중심인 중구봉은 정월 대보름에 달집을 태우고 달마중을 하던 곳이다. 중구봉 너머에 서당골, 큰말 뒤에 큰말 뒤너머, 명상골, 도랫말 뒤넘어, 갓골, 너멍골, 뒤릉골이 있다. 안말 입구에 큰 느티나무가 있다.

옛날에는 세 그루가 있었는데 어미 나무는 화재로 소실되고 동생 나무는 고사하여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았다고 한다. 옛 삼괴정(三槐亭)의 위치를 추적하는 기점이 될 것 같다. 큰 도로에서 마을로 진입하는 곳에 터넘, 여느말, 차돌고개, 동구래 솔밭이 있다. 강건너 철봉산 송골에는 철광석을 채취하던 굴이 남아있고 상수도 취수보가 있는 자리가 방달여울이다.

칠방리는 원래 옻뱅이인데 웃말, 샛골, 벌밭, 아랫말, 모시래, 시누리 등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강건너 시누리는 폐촌되어 빈터만 남아 있고 모시래는 철로와 도로 사이에 있던 집들을 도로 확장공사 때 모두 이전시켜 폐촌 되었다.

웃마을은 선산곽씨(善山郭氏)의 집성촌이고 아랫말은 성주이씨(星州李氏)의 8세조이신 옥천군수를 지낸 이흥노(李興老)공이 터전을 잡은 이래 대를 이어 살고 있다.

마을앞 넓은 들에는 가장골, 왜마루, 숫들, 봇들 등의 이름이 남아있고, 아랫말과 샛골 사이에 호무까가 있는데 옛날 홍병사의 묘가 풀 한포기 없는 황토언덕만 남아있어 홍묘가라 부르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마을뒤 강가를 시무터라 하는데 철봉산 송골에서 철광석을 채굴할 때 철광석을 야적했던 쇠묻이에서 유래된 듯하다. 시무터 강언덕 풍광 좋은 곳에 별장촌이 생겨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옆을 흐르는 산내또랑은 장찬또랑과 합류하여 금강으로 유입된다. 아랫말 서쪽의 작은 동산을 옻방메 또는 개구리봉이라 부른다. 건진리에서 길게 동으로 뻗어 나온 산을 고바우, 또는 뱀날이라 부르는데 일봉산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다.

윗말 뒤에는 상수도사업소, 아랫말 갯밭에는 옥천학생야영장이 생겨 휴양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