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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면 두암리 삼층석탑(伊院面 斗巖里 三層石塔)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이원면 두암리 삼층석탑(伊院面 斗巖里 三層石塔)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2. 2. 12. 15:35

 

 

 

 

 

 

 

 

 

 

 

 

 

 

 

 

 

 

 

이 삼층석탑은 제작 수법으로 보나 부근에서 수습되는 기와조각으로 보아 고려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탑은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제짝을 갖추고 있어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며 이층의 기단위에 세운 일반형 석탑으로 규모는 335cm밖에 되지 않는 비교적 작지만 아름다운 탑이라 하겠다.

아래층의 기단면석에는 신라와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안상을 새기고, 일층 탑신에는 문과 자물통이 조각되어 있어, 이와 같은 숫법은 신라시대에 유행하였던 것으로 신라문화의 영향을 받은 고려시대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탑의 상륜부는 대부분 없어졌으나 노반과 보개석은 남아 있다. 이 탑의 부근에는 민가가 자리를 잡고 있어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사찰의 기와조각이 마을전체에서 발견되고 있어 규모는 매우 컸을 것으로 보이며 기와는 고려시대의 기와조각만 발견되고 조선시대의 기와는 발견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조선초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 없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절의 이름과 창건 및 폐사에 관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이원리는 원래 옥천군 이내면(利內面) 현리(縣里)와 역리(驛里)가 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1739년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이내면 현리라 하여 106호, 역리에 41호가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1891년 신묘장적(辛卯帳籍)에는 현리 64호, 역리 61호가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을 전면적으로 조정하면서 면의 이름을 이내면(伊內面)으로 고치고 현리와 역리가 합하여 이원리가 되었다. 2007년말 현재 현남에 29호 52명, 현리에 78호 202명, 두암에 29호 71명이 살고 있다. 1929년 이남면과 이내면이 합하여 이원면이 되면서 이 마을이 면소재지가 되었다.

이원리가 된 것은 현리는 이내면의 소재지였기에 이내면(伊內面)의 이(伊)자와 역말에 토파역(土坡驛)과 우현원(牛峴院)이 있었는데 우현원의 원(院)자를 따서 이원리가 되었다. 현리(縣里)라 함은 신라초에는 소리산현(所利山縣) 이었고 경덕왕 이후부터 고려 때 까지는 이산현(利山縣) 이었으며 바로 이 마을이 현의 소재지였기 때문에 현리라 불러왔다.

현리는 대밭말, 선말, 장터로 구분 되는데 옛장이 있던 곳이므로 구장터라고 부른다. 대밭말 뒤쪽 성재산 남쪽기슭에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선생의 문집 판목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있는데 1986년에 자손들이 그 판각을 모두 경기도로 옮겨서 빈 집만 남아있다.

대밭말과 장터 사이에 창주서원지가 있는데 서원은 훼철되고 묘정비만 남아 있다. 묘정비의 비문이 마모되어 판독이 어렵다. 1998년 안남면 도농리에 조헌선생의 표충사를 다시 짓고 신도비에 비각을 세울 때 이 묘정비에도 비각을 세우고 주변에 잔디밭을 조성하였다.

선말은 선바위가 있는 마을이다. 다리골 입구 냇가에 서 있는 이 바위는 온 주민이 신성시하는 바위이다. 주변에 콘크리트로 치장을 한 것이 눈에 거슬린다.

역말은 역리라고도 불렀는데 이곳에 토파역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 현남(縣南)이라 불리기도 한다.

두암은 말바우란 옛말을 한자화 할 때 말두(斗)자와 바위 암(岩)자를 써서 두암이라 하였는데 사실은 이곳에 백촌 김문기(白村 金文起) 선생의 별장인 마암계당(馬巖溪堂)이 있어 마암을 ‘말바우’라 부르게 되었는데 한자화 할 때 말 마(馬)가 아닌 말두(斗)자로 쓰게 되어 두암리가 되었다. 두암리에는 충청북도유형문화재 120호로 지정 받은 삼층석탑이 있다. 영동군과 경계지점인 월이산에 봉수지가 있어 옛날 영동군 용산면에 위치한 박달라산에서 받아 군북면 환산의 봉수대로의 통신을 담당하였다. 현리소류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