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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읍 삼산리 현감윤경룡휼군영세불망비(報恩邑 三山里 縣監尹敬龍恤軍永世不忘碑) 본문
보은동헌 앞뜰에 모아 놓은 선정비중에 3기가 공교롭게도 모두 현감 윤경룡의 비이다.
비를 바라보면서 오른쪽에서 3번째 비석까지 모두 윤경용룡 비석이다.
세번째 비석이 인 휼군영세불망비는 아마 비의 내용으로 보아 윤경룡이 현감시설 군의 식량사정을 좋게 개선한 공로가 아닌가 한다
도내에 흩어진 많은 선정비나 공적비등이 당사자 자신들의 치적을 나타내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주민들의 진정한 마음이 담긴 진정한 선정비와 공적비는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내 혼자만의 생각이길 바래본다
벼슬아치들의 선정비가 조선시대 초창기에는 좋은의미로서의 선정비가 세워졌지만
나중에 조선 후기로 오면서 부터는 자신의 치적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세워지면서
백성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였음을 인정할수밖에 없는 듯 하다.
조선후기로 오면서 의도되지 않은대로 벼슬아치들의 선정비가 많이 세워짐으로 인하여 그 부담이 백성들에게 전가됨으로 백성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수령 선정비는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비가 많다고 생각되어 왔다
대부분의 선정비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곳에 세우는것이므로 비석거리라는 지명도 생겨났다.
자료에 의하면 선정비가 급증하는 것은 19세기부터이며 특히 고종조가 극심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한떄는 중앙정부가 직접 나서서 선정비의 건립을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19세기가 되면서 삼정문란이 극심해 지자 조세 감면 등 일시적인 혜택을 베풀고 이를 근거로 선정비를 세우는 사례가 늘어난다.
이것이 선정비 급증의 주원인이었다.
보은동헌 앞뜰에 자리한 보은을 스쳐간 벼슬아치들의 선정비를 바라보며 마음이 씁쓸해진다.
교사리 춘수골 삼거리에도 윤경룡의 선정비가 1기 더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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