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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읍 성족리 장암,충암선생유허비(報恩邑 聲足里 壯菴,沖菴先生遺墟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보은군(報恩郡)

보은읍 성족리 장암,충암선생유허비(報恩邑 聲足里 壯菴,沖菴先生遺墟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2. 9. 25. 20:48

 

 보은읍 성족리에 있는 김정 유허비(金淨 遺墟碑)이다.

성족리에 있으며, 조선 중종(李朝 中宗)때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충암의 유허비이다,

비명은 충암 김선생유허비(沖庵 金先生遺墟碑)이고 비문은 찬성 송환기(贊成 宋煥箕)가 지었다고 함. 조선 순조(朝鮮 純祖)때 세움.

성족리(聲足里)라는 지명은 처음에는 소라리 송촌이라 불러왔으나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곳에 왔다가 훌륭한 충암선생이 태어난 곳이라

대현지후가성족(大賢之後家聲足)이라 해서 성족이 되였다고 한다.

 

 

이조시대 수많은 사화가 있었지만 그 꾀함이 음흉하고 처형이 참혹하기는 기묘사화가 제일이었고, 기묘사화에 처형된 어진 사람 중 가장 처절하게 죽은 사람이 바로 지위가 가장 높았던 충암 김정 선생이었다.


충암의 형이 광이니 자를 회실이라 하고 호를 장암이라 했다. 김광 선생은 1482년 성종 13년 정인 효정의 아들로 보은읍 성족리에서 태어났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글자를 알았고, 놀 때는 사양하는 예도 알았다. 여덟 살이 되어서는 경서와 사기를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13살에는 증자의 하루 세 번 반성할 것과 인자의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움직이지도 말라는 글을 책상위에 써 놓고 스스로 경계하며 성현의 글을 읽었다.

19살이 되던 해에 부친이 죽자 상복을 벗을 때까지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사마사를 거쳐 참능참봉에 제수되었으나 학문이 짧다는 이유로 취임을 하지 않았다.

1506년 중종 원년에 연산군을 몰아내고 반정에 성공한 공신들이 부당하게도 국모인 신비를 쫓아내려하자 의가 아니라고 배척하는 뜻을 시로써 표현했고, 신비의 복위를 상소하기도 했다.

1519년 중종 14년 사화가 크게 일어 나자 선생은 세상에 뜻을 잃어버리고 물이 양 계곡에 흐르는 높은 곳에 집을 짓고 좌우에 암자를 세우고 그 암자에 장암이라는 현판을 달고 숨어 버렸다. 장암이란 별호는 이때부터 부르기 시작됐다. 선생은 이곳에서 손수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가꾸며, 한가롭게 책도 읽고 주위를 거닐며 살았다.

1521년 중종 16년, 김광 선생은 사랑하던 아우 충암 김정 선생이 제주도에서 죽음을 당하자 선생은 당질인 응교 천우와 함께 제주도로 가 아우의 시체를 안고 돌아왔다. 제주에서 돌아오는 도중 바다 중간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풍랑이 크게 일어나 살길이 어렵게 되었다.

이때 선장이 “옛날부터 관이 배 안에 있으면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며 “만일 시체를 싣고 바다를 건너가는 사람이 있으면 말하시오”라며 배 안을 샅샅이 뒤졌다.

이후 시체를 발견하자 선생은 아우의 시체를 끌어안고 슬피 통곡하니 얼마 후에 풍랑이 멈추었다. 그리하여 무사히 육지에 도착했고, 선장은 이상한 일이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선생의 돈독한 우애에 하늘이 감복한 일이었다

그때 선생의 어머니는 76세의 노인으로 작은 아들이 비명에 죽은 것을 애통하게 여기고 매일을 눈물과 탄식으로 지내자 선생은 “아우가 비록 비명에 갔으나 신하의 도리를 다하였고, 의에 죽은 것이니 공자의 살신성인의 가르침을 조금도 어기지 않았으니 너무 서러워하지 마십시오”하자 어머니도 슬픔을 참고, 살아가게 됐다.

선생은 항상 아들과 조카들에게 이르기를 “부귀는 좋기는 하나 빈천만 못하다. 부귀는 위험하기 쉽지만 빈천은 욕되지 않다. 욕되지 않음은 위험하지 않고, 위험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다. 마음이 편한 것이 곳 부귀이니 내 자손이 마음을 움직이고, 벼슬을 탐하여 분주스럽게 하여 빈천을 지키지 못한다며 그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니 너희들은 이 말을 명심하여 삼가라”고 훈계했다.

1545년 인종 원년에 선생은 64세로 별세할 때까지 조정의 득실을 말하지 않고 세인의 잘못을 묻지 않고 조용히 세상을 살다 갔다.

 

 

 

 

 

 

 

 

 

 

 

 

 

 

 

 

 

김정 (충암)의 생애
35세 때인 1520년 절해의 고도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을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어 그 안에 가두어 두는것)된 충암은 비운의 삶이었지만 도학자로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뜻을 고수하였다.

그는 비록 죄수의 몸으로 유배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제주도민(濟州島民)의 생활상을 살펴 그들의 현실과 미래를 위하여 흥학교화(興學敎化)에 나서기 시작했다. 당시 제주도는 사람들이 몽매하고 상장제의(喪葬祭儀)의 예절을 모르며 음사(淫詞)하는 풍속이 있었고 뱀을 비롯한 동물들을 숭배하는 미신이 성행하였다.

충암은 이를 교화하고 가르치니 백성들의 풍속이 조금씩 변화되었다. 또 우물을 파서 맑은 물을 마시게 하였는데 그 우물은 판서정(判書井)이란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1521년 36세 때 그 곳에서 보고 느끼고 체험했던 내용을 기술하여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을 남겼다.

이 글은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16세기 제주지역의 풍토와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낸 것으로 최초의 제주풍토지라는 점과 문학적으로도 훌륭한 수필이라는 점에서 높게 평가 받고 있는 작품이다.

중앙의 주요직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사장파( 勳舊 詞章派)들은 사림지신(士林之臣)들을 멀고 먼 오지까지 유배 보내놓고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무고한 간교를 꾸며 이들에게 엄한 벌을 내리도록 간청하는 상소를 올려 중종은 드디어 충암의 자진(自盡)을 명하게 되었다.

36세 되던 1521년 10월 30일 충암은 제주목사 이운(李耘)이 전해 준 사약을 받고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술을 가져오게 하여 마신 다음, 목사 이운의 손을 잡고 시사(時事)를 묻고 ,형 光과 아우 易에게 편지를 보내어 노모를 잘 봉양토록 부탁한 후 ,절명사(絶命辭)인 임절사(臨絶辭)를 남기고, 한 맺힌 일생을 마쳤다.  부인 宋씨는 자녀가 없었으므로 형 장암(壯庵)의 차자(次子) 철보(哲?)를 후사로 삼았다. 충암이 제주에서 사사(賜死)되자 형인 光 (壯庵)은 동생 易, 哲? 등과 함께 제주로 가서 아우의 시신을 안고 돌아왔다.

충암이 죽은 이듬해인 1522년 겨울 계자 철보와 동생 역이 함께 청주 주애현 탑산리 창구에 반장(返葬 )하였다. 그 후 이 지역이 대청호 건설로 수몰됨에 따라 보은 성족리로 이장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1979년 9월 25일 현재의 대전시 동구 신하동으로 이장하였다.

충암에게 수학한 종질 김천우가 유고를 모아 충암집을 편찬하고, 허호재(許浩齊)가 공주에서 판각하여 세상에 널리 보급되었다. 詩文을 포함한 문집 5冊과 연보 2冊이 전하고 있다. 그의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公은 천성이 장중(壯重)하며 언소(言笑)가 적었다. 文章은 정묘(精妙)하고 심오(深奧)하며, 멀리 서한의 체제를 따랐고, 시학(詩學)은 당성체(盛唐?)를 본 받았다. 경전(經典)에 침잠하고 밤낮으로 단좌(端坐)하여 공경(恭敬)하는 것을 익히고, 정(情)을 주장하는 학문을 하였다.

의견을 말하고 일을 행할 때에는 반드시 성현(聖賢)의 뜻을 표준으로 삼았다. 살림을 돌보지 않고 녹봉(祿俸)은 널리 이웃에 나누어 주었고, 청탁은 통하지 않았으며, 추종하는 자는 문에 들이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충암의 올곧은 성품, 학문, 문학, 사상 등이 함축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가 죽은 후 1545년에는 죄명이 삭제되고 관작이 복관(復官)되었다. 선조 초에 퇴계 이황은 글을 올려 “ 중종 조에 장차 삼대지치를 일으키고자 조광조, 김정, 기준 등 현량이 협력 찬양하여 기강을 바로잡고 개혁을 시도한 것을 남곤. 심정의 무리가 이를 꺾어 버렸으니 상(임금)께서는 곤. 정의 무리에게서 벼슬을 앗고 현량들을 위하여 사신을 보내어 제사를 올리소서 ”하는 건의가 있었다. 율곡 이이도 “석담일기”에서 정암, 충암등 신진사류들은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를 다스릴 재주를 타고 났음에도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정치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구세력의 비방도 내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선조 1년에는 충암에게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가 다시 8년 후에는 문간(文簡)으로 고쳐지고, 영조 24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제주도에서는 충암의 공적을 기려 그가 절명한지 57년 만인 선조 11년(1578)조인부 판관에 의해 충암 묘(사)가 세워지고 귤림서원을 세워 그를 우러러 추앙하여 왔다.  오늘날 오현단 경내에는 충암을 기리는 유허비가 세워져 있는데 원래는 가락천 동쪽의 적소에 있던 것을 해방이후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비신이 파손되어 하반부가 없어진 상태로 남아있다.

충암은 22세에 출사(出仕)한 후 36세에 사사(賜死0되기까지 15년여의 삶 중에서 10여년에 걸친 관직생활과 5년여의 유배 및 귀양생활을 하는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겪었다.
 부인 송씨는 시어머니 허씨를 성심껏 보양하다가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남편의 뒤를 따라 자진(自盡)하였다. 영조 때 송씨 부인에게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대전시 동구 신하동에는 송씨부인의 정문이 있다

3. 충암의 학문과 사상
충암은 36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애석하게 희생된 이 고장이 배출한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다. 그는 우리 역사상 드물게 볼 수 있는 천재로서 도학자요, 경세가요, 문장가로서 높은 학문과 도덕을 실천하며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하여 진력하다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충암은 조광조와 함께 지치주의의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여 향촌의 상부상조를 위한 향약(鄕約)을 간행. 보급하여 백성들을 교화하고자 하였다. 그는 선하면 복을 받고 음(淫)하면 화를 당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허물이 없이도 화를 당하는 경우가 있으며, 그것은 기수( 氣數) 로 미루어야 한다고 하여 천인합일적(天人合一的)인 견해를 밝혔다.

또한 임금은 천리(天理)를 대신하여 만물과 천의 사이에 있기 때문에 인(仁)함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여 천인합일에 기초한 왕도설(王道說) 즉 왕도정치를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인(仁), 경(敬), 효(孝), 자(慈) 신(信)의 다섯 가지가 모두 敬에 포함될 수 있다고 하여 敬을 강조하였다. 敬은 위아래를 관철하는 공부이므로 학문에서부터 ,중화( 中和), 위육(位育), 독공(篤恭)하여 천하를 平溫하게 하는 일까지 모두 경의 범주라고 하면서 경의 의미를 근독(謹獨)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편 미신타파를 위하여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였으며, 특히 아동. 청년의 교육지침서인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중요시하여 이를 널리 보급하여 예교 (禮敎)를 두텁게 하였다. 또한 과거제도의 폐단을 줄이는 동시에 수구세력을 몰아내고 서정의 쇄신을 도모하기 위하여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천하의 덕행 있는 인재를 널리 구하여 발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