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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면 상발리시지 석불(南二面 上鉢里寺址 石佛) 본문
이 곳 저곳은 많이 다녀 보았지만 남이면 상발리에 위치한 석불을 볼때마다 참 마음이 아린다.
한양조씨 문중들의 무덤이 자리한 작은 동산 한켠에 작은 벽돌집에 위치하고 있다.
경지정리를 하면서 그 동안 땅속에 있었던 유물들이 빛을 보았다고 한다.
많은 파불들이 발견되였다고 하는데 그 동안 훼손과 더불어 도난을 당하고 현재는 세구만이 자리하고 있다.
상발리사지에 남아 있는 석불들로서 심하게 파괴되고 머리를 모두 결실하였다.
불두(佛頭) 가운데 하나는 1976년까지 있었으나 도난을 당하였다고 한다.
파불(破佛) 6구는 모두 화강암으로 조성되었으며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좌상(坐像)이다. 보호건물의 중앙에 봉안된 석불은 이들중 가장 큰 석상(石像)으로서 1988년에 새로 발견되었는데 이곳에 있던 다른 소상(小像)들과 함께 보관하고 있다.
1988년에 새로 발견된 석불은 규모로 보아 본존상으로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약합을 들고 있는 수인(手印)으로 보아 약사상(藥師像)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머리는 결실하였으나. 각부의 조각은 잘 남아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남아 있고 어깨와 가슴은 당당하고 균정되어 있다.
법의(法衣)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옷주름이 왼쪽 어깨로부터 유려하게 흘러 무릎 아래까지 덮었다. 수인(手印)은 왼손은 결가부좌한 무릎 위에서 상장(上掌)하여 약합을 받쳐들고 있고,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에 올려 놓았는데 마멸이 되었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히어 있으며 조각기법이 정제되고 선이 부드럽다. 조성시기는 나말려초(羅末麗初)로 추정된다. 크기는 현재 높이 60cm, 어깨높이 47cm, 어깨너비 28cm, 무릎높이 29cm, 무릎너비 70cm이다. 나머지 2구의 석상들은 머리부분을 뺀 현재높이가 30cm 전후되는 작은 불상들로서 모두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를 착용하였는데 가슴에서 U자형으로 대칭을 이루는 옷주름의 조각이 비교적 유려한 편이며, 수인(手印)은 아미타인(阿彌陀印)과 합장인(合掌印) 등이 보인다.
매우 작고 심하게 파손되었지만 조각이 잘되 석상들로서 협시불(脇侍佛) 또는 나한상(羅漢像) 으로 조성된 듯하다.
전국문화유적 총람에 의하면 상발리 사지는 팔봉산(八峰山)의 북서쪽 기슭인 상발리(上鉢里) 속칭 양절마을(陽寺洞)에 있는 고사지(古寺址)이다. 임진왜란 때 강내면 연정리에 살면서 의병을 일으켰던 조강(趙綱)이 지은 <<모계집(慕溪集)>>의 기록 가운데 이 사지에 대한 내용이 일부 보인다. 즉 조마의 부친인 조반(趙槃)이 이 곳에서 공부했는데 옛날 이 절의 이름에 따라 마을이름이 양사동이 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사지명이 ‘양사(陽寺)’였다는 전설과 부합되고 있으나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사지는 현재 대부분 밭이 되었으며 서편에는 한양 조씨(漢陽趙氏)의 재실(齋室)이 있다. 특별한 유구는 없으나 주변에서 많은 고려∼조선시대의 와당(瓦當)과 평와편(平瓦片)이 발견되고, 두부(頭部)를 결실한 석불좌상(石佛坐像) 6구가 따로 보호각 안에 보존되고 있다. 재실의 지붕에 장식된 망와(望瓦)는 본래 조선 중기 이후의 일반형인 삼산형(三山形) 암막새기와인데 그 내림새에 ‘강희이십오년칠월일 편수승인수(康熙二十五年七月日 片首僧印洙)’라는 양각문(陽刻文)이 있다. 조선 숙종 12년(1686)에 사찰 건축의 책임을 맡은 편수승 인수스님이 기와를 구운 사실을 명기한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절이 한 차례 중건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이 기와들이 다른 데서 옮겨온 것인지는 역시 알 수 없다.
현재는 불두와 좌불3기는 도난을 당한체 불상 3구만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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