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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면 화양리 우암송시열유적(靑川面 華陽里 尤庵宋時烈遺蹟)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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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면 화양리 우암송시열유적(靑川面 華陽里 尤庵宋時烈遺蹟)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2. 11. 22. 19:04

 

청천면 화양리에 위치한 우암 송시열선생의 유적입니다

화양서원서 부터 만동묘 그리고 만동묘정비등 우암선생의 많은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1695년(숙종 21)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하기 위해 권상하(權尙夏)·정호(鄭澔) 등 노론이 주도해 설립했으며, 다음해 사액(賜額)을 받았다. 이곳은 송시열이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친 연고지이며, 일찍이 명나라 의종의 '비례부동'(非禮不動) 4자의 친필을 얻어 암벽에 새기고 암자를 세웠던 곳이다. 또한 1717년에는 만동묘(萬東廟)가 세워졌던 곳으로서 노론집권기에 국가로부터 많은 토지와 노비를 받는 등 송시열을 제향한 전국 44개 서원 가운데 위세가 가장 큰 서원이었다. 화양서원은 권세가 막강하여 백성들의 폐해가 심했다. 즉 제수전(祭需錢)의 명목으로 각 군·현에 화양묵패(華陽墨牌)를 발송해 강제로 돈을 걷거나, 춘추제향(春秋祭享)을 지낸 뒤 원임(院任)들에게 치번(致膰)을 제공한다는 목적으로 복주촌(福酒村)과 복주호(福酒戶)를 운영, 요역을 피하려는 부민(富民)으로부터 돈을 받고 피역(避役)시켜 부민이 지던 역을 가난한 백성들이 대신 떠맡게 하는 폐단을 일으켰다. 이러한 횡포가 거듭되자 1858년(철종 9)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의 주청으로 복주촌을 없애고, 재화 징수도 금지시켰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중국 명나라의 임금인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라는 사당에 자리잡고 있다. 만동묘는 우암 송시열의 가르침에 따라 그의 제자 수암 권상하가 명나라 의종이 죽은 지 60년이 지난 숙종 30년(1704)에 지은 것이다. 비의 형태는 연꽃무늬를 새긴 바닥돌 위에 네모난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문은 일본인들이 고의로 글자 획들을 쪼아 놓아 알아보기가 힘들다. 영조 23년(1747)에 세웠으며, 이재가 글을 짓고, 유척기가 글씨를 썼다.

 

 

 

 

 

 

 

 

 

 

 

 

 

 

 

 

 

 

 

 

 

 

 

 

 

 

인조 때 송시열(宋時烈)이 명나라 의종(毅宗)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는 글 한 폭을 받고서 이 글을 화양동 석벽(石壁)에 새겨 놓고 석벽 위에 공부하는 사당을 지었는데, 송시열이 죽을 때 그의 제자 권상하(權尙夏)에게 이곳에 묘우(廟宇)를 지어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내도록 하여 권상하가 유림을 동원하여 지은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 묘에 딸린 전토(田土)와 노비를 주었고, 영조 때에는 묘를 중수하였으며 면세전(免稅田) 20결(結)을 주었다.

1809년(순조 9)에는 묘우를 개축하고 1844년(헌종 10)에는 정식으로 봄과 가을에 한 번씩 관찰사가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이 묘는 노론(老論)의 소굴이 되어 상소와 비판을 일삼았고, 비용을 염출하기 위해 양민을 토색하는 등 민폐가 심하여,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헐어버리고 신주와 편액(扁額) 등은 서울 대보단(大報壇)의 경봉각(敬奉閣)으로 옮겼다. 대원군이 실각한 후 1874년(고종 11) 다시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도 유생들이 모여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므로 총독부가 강제로 철거하였다.

 

 

 

 

화양서원 못지않게 기세 등등했던 것이 만동묘이다.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과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하던 사당이다.

송시열의 유촉에 따라 숙종 30년(1704)에 권상하 등이 화양서원 안에 건립하였고 ‘만절필동’에서 처음과 끝자를 따서 만동묘라 했다.

영조 2년(1726)에 나라에서 만동묘에 제전과 노비를 내려주었고 그후에도 예조에서 90명이 돌아가며 묘우를 지키게 하는 등 여러 가지 지원을 했다.

정조 즉위 후에는 어필로 사액을 받았고 순조 때는 옛 건물을 헐고 다시 지었으며 헌종 때는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에 관찰사가 정식으로 제사를 지냈다.

당시 만동묘는 신위를 봉안한 5칸짜리 묘우와 제관들의 숙소나 유생들의 회합 등에 쓰이던 정침과 동서 협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해마다 만동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는 전국의 유생 수천 명이 모여들었고 1년 내낸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이 유생들의 집합소가 되면서 화양서원과 마찬가지로 폐단이 극심해졌다.

고종 2년(1865), 나라에서는 서울의 대보단에서 명나라 황제들을 제사지내므로 따로 제사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만동묘를 폐했다.

이후 흥선대원군이 실권한 후에 재건되었으나 순종 1년(1907) 일본 통감이 만동묘를 폐철하고 그 재산을 국가와 지방관청에 귀속시켜버렸다.

일제강점기에도 비밀리에 제향은 계속되었으나 1940년부터는 아주 끊겼으며 1942년에는 건물도 모두

철거되었다.

그토록 위세 등등했던 화양서원과 만동묘는 지금 운영담과 금사담 맞은편에 주춧돌과 축대, 묘정비만 있는 빈터로 남아 있다.

그중 만동묘 묘정비는 일본인들이 글자 획을 쪼아 알아볼 수 없게 만든 후 땅에 묻었던 것을 1983년 홍수 때

찾아내어 옛 자리에 세워놓았다.

만동묘 묘정비는 충청북도 기념물 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