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매곡면 노천리 박응훈효자문(梅谷面 老川里 朴應勳孝子門)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영동군(永同郡)

매곡면 노천리 박응훈효자문(梅谷面 老川里 朴應勳孝子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3. 6. 5. 13:11

 

영동군 향토유적 제 54 호 오촌 박응훈(梧村 朴應勳, 1539∼1590)은 임진왜란시 의병장인 박이룡 장군의 동생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다.

부모상을 당하여 장지를 구할 때 호랑이가 나타나 묘소를 정해 주었으므로 이를 호점산소(虎占山所)라 하며, 묘소는 황간면 소계리 안산에 있다.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는데 밤마다 호랑이가 나타나 공을 지켜 주었다고 한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선조 34년(1601년) 정려(旌閭)가 내려졌고, 현종때 송계서원에 배향 되었다.

옆의 열려문은 통덕랑(通德郞) 박수현(朴守玄)의 처 열부 선산 김씨를 표창하는 문으로 경종 3년(1723년)에 정려되어 쌍려문이 된 것이다.

이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 둥근기둥의 맞배 기와집으로 1976년 도로확장 공사시 약간 위로 옮겨져 다시 세워진 것이다.

※ 정 문 : 충신, 효자, 열려 등을 표창코자 그 집 앞에 세우는 붉은 문 ※ 배 향 : 문묘나 사원에 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모심

 

 

 

 

 

 

 

 

 

 

호랑이도 도와준 효자 박응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박응훈의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백방팔방으로 알아보아도 차도가 없자 그는 가족들에게 소상히 말하고 지금 당장 약을 구하러 떠난다고 일렀다.
하지만 모두가 내일 아침 일찍 떠나라고 말렸다. 그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약을 구하러 100리가 넘는 험한 밤길을 떠났다. 온갖 동물들의 울음 소리가 그의 귀를 때렸지만, 그는 무서움보다 아버지의 병을 고친다는 효성스런 마음으로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하였다.

그가 밤새껏 달려 상주고을 입구에 닿았을 때 갑자기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막았다.

박응훈은 호랑이에게
"내가 너의 등에 타라는 것이냐? "
라고 물었다. 호랑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웅훈은 호람이 등을 타고 상주읍내에 있는 정약국에 가서 아버지의 약을 지어 기쁜 마음으로 약국을 나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랑이는 그에게 다시 타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호랑이를 타고 삽시간에 집으로 돌아오니 가족들은 꿈인가 생시인가를 확인하면서 다같이 기뻐하였다.

아버지께 정성껏 약을 달여 드리니 병환이 곧 완치되었다.
그와 식구들은 신기하다며 호랑이에게 고마워했다.

박응훈은 계속해서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한겨울에도 꽁꽁 얼어붙은 강을 깨고 얼음속에 있는 잉어를 구하여 아버지 밥상에 놓아 드렸다.

그 외에도 그는 아버지를 위하는 일이라면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온힘을 다하여 아버지를 섬기는 등 효성이 지극하여 이웃 마을까지 칭송이 자자했다.

그가 있는 정성을 다하여 부모님을 모셔 오던 중 1571년(선조4년)에 아버지께서는 향년 92세로 별세하였다. 7형계는 지관을 데리고 영산하러 가던 중 박응훈을 태워주었던 호랑이가 나타나서 상복을 이끌면서 인도하는 것이었다.

호랑이를 계속 따라가니 어떤 장소에 이르러 그 호랑이는 발톱으로 땅을 파기 시작하였다.

이를 본 박응훈이
"이 곳이 장지가 되겠느냐? "
라며 호랑이에게 물었다.

호랑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박응훈과 형제들은 그곳에 아버지를 정성껏 모셨다.

효자 박응훈은 아버지께서 잠드신 묘소 바로 아래에 노막(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할 때에 호랑이도 자주 찾아와 그와 같이 밤을 세우기가 일쑤였다.

그리고 호랑이가 토끼나 노루등을 잡아 가지고 와서 정성껏 제물로 썼다.
엄동설한에는 호랑이가 박응훈을 안아 따뜻하게 해주고, 여름 장마때에는 습하여 종기가 나게 되면 인정 많은 호랑이는 혀로 핥아서 고쳐 주기까지 하였다.

또한 아침저녁으로 성묘할 때도 호랑이는 앞장서서 이슬도 털어주고 꼬리로 흰 눈도 쓸어 주기도 했다.

박응훈은 3년동안 갖은 정성을 다해 시묘살이를 마치고, 아버지곁을 떠나 집으로 내려올 때 같이 있었던 호랑이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니 호랑이는 고개만 끄덕이면서 깊은 산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몇 달이 지난 어느날, 꿈속에 호랑이가 나타났다.
호랑이가 산을 달려 가다 커다란 함정에 빠져 눈물을 흘리면서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 보니 그 때는 한밤중이었다. 그는 옷을 주섬주섬 입은 후, 말을 몰아 백여리가 넘는 산길을 달려 갔다. 가까스로 도착해 보니 사람들이 벌떼같이 모여 있고 은공의 호랑이는 쓰러져 죽은 채 함정 밖으로 끌려 나오고 있었다.

박응훈은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면서 관가로 즉시 달려갔다. 그는 호랑이와 관계된 사연을 원님께 아뢰었다. 윈님께서도 출천지효라고 말하면서 관군을 동원하여 호랑이를 운반하여 선생의 집 뒤에 있는 곳에 매장하니 그 곳이 그 유명한 호총인 것이다.

효자 박응훈에게 후손이 없어 방손들이 제를 정싱껏 모시며 호랑이의 묘인 호총에도 술, 포, 과일 등 모든 음식을 정성껏 차리고 제를 올리고 있다.

이같은 박응훈 효자의 지극한 효성을 가리기 위하여 1601년(선조 34년) 조정에서는 매곡면 노천리에 정면 두칸, 측면 1칸으로 된 맛배기(지붕 모양이 들 입(入)자 모양으로 된, 주로 서민들이 살았던 집)로 꾸민 효자문을 세웠다.

또한 매곡면 수원리에 있는 송계서원에서 선생의 제사를 모시고 있으며 그의 묘와 호총은 황간면 소계리 호점산에 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향사 축문을 다음과 같이 지었다.

// 지성을 우러러 생각하니 //
// 자고로 필적할 곳이 없구나 //
// 효가 호랑이를 감동케 하여 //
// 승사하기를 비복같이 하더라 //

< 참고문헌> : 「문화재지」, 「인물지」 (충청북도 1987) , 「영동 향교지」, 「영동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