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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면 태성리 각연사(七星面 台城里 覺淵寺) 본문
태성리에서 각연사까지의 거리는 약 10여리정도이다.
도로는 잘 닦여서 차량으로 이동하는데 지장은 없다
우측으로의 계곡은 태성리 사람들의 식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나 보다.
각연사 못미쳐 보개산 각연사라고 음각된 시주석이 자리하고 있다.
도로공사를 하면서 발견되였다고 하는데 시주한 사람의 이름도 적혀있다.
보물 433호 (1966년 2월 28일 지정)
비로전 내부에 모셔진 불상은 석조 비로자나 부처님이다. 비로자나라는 말은 Vairocana를 음역한 것이며 의역하면 “대일여래(大日如來)”라고 할 수 있다. 대일은 “위대한 빛”으로 해석된다. 우주의 통일된 원리, 절대적인 원리를 상징하는 부처님으로 화엄경의 주존이기도 하다. 비로자나의 모습은 지권인이라는 수인으로 대표된다. 지권인의 수인을 한 부처님은 우리나라에서 9~10세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불국사의 비로자나불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각연사의 비로자나불 역시 지권인을 결하고 있다. 지권인은 왼손의 검지손가락을 오른손 바닥으로 감싸 쥔 모습으로 표현되며 절대적인 지(智)를 상징한다. 각연사의 비로자나불상은 광배와 대좌를 모두 완전하게 갖추어 전해지기 때문에 문화재적인 가치가 지대하다. 대좌는 팔각형의 평면을 기본으로 구성되었는데 하대석은 연꽃의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중대석 역시 팔각형의 평면으로 만들어졌는데 외부에는 구름무늬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상대석은 원형의 평면이며 앙화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광배는 매우 화려하게 조성되었다. 총 7구의 여래 모습이 좌우에 조각되어 있으며 배경으로 강렬한 화염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불상은 결가부좌하고 있는 모습이며 수인은 지권인을 하고 있다. 귀부분이 길게 표현되었으며 머리에는 나발의 모습이 세세하게 표현되었다. 복식은 편견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비로전은 비로자나를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비로자나는 Vairocana의 음역(音譯)으로 모든 곳에 광명(光明)이 두루 비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26호 (1982년 12월 17일 지정)
각연사의 주불전으로 대웅전이 세워져 있다. 대웅전 상량문의 기록에 의하면 융경(隆慶, 1567~1572), 순치(順治, 1644~1661), 강희(康熙, 1662~1722)년간에 대웅전을 중수한 바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현재의 대웅전은 1768년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771년 내부에 모시고 있던 삼세불 및 관세음보살을 개금한 기록이 전하지만 현재 대웅전 내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은 정면 3간, 측면 3간의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어간을 협간에 비해 약간 크게 간살이 했으나 그 크기는 크지 않다. 기단은 다듬은 돌을 이용해 정연하게 쌓았다. 긴 장대석을 가로로 길게 4단씩 쌓아 기단을 만들었다. 주계단은 기단 정면 중앙에 만들어졌으며 기단과 마찬가지로 장대석을 쌓아 만들었다. 초석은 다듬은돌과 막돌을 모두 사용하고 있는데 다듬은 돌이더라도 그 형태가 부정형의 모습을 갖고 있으며 단지 초석의 상면을 평평하게 다듬은 정도이다. 기둥은 원기둥을 사용했고 민흘림을 갖고 있다. 민흘림기둥은 상부의 직경이 하부의 직경보다 작게 만든 기둥을 말한다. 어간의 좌우에 위치한 기둥 상부에는 용머리 모양을 조각해 꽂아넣었다. 공포는 다포식의 공포로 구성했다. 공포는 외3출목, 내5출목으로 구성했다. 내부 출목이 5출목인 건물은 매우 장식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조선시대 후기에 건립된 건물에서 많이 확인되는 모습이다. 대웅전의 처마는 서까래 상부에 부연을 덧단 겹처마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붕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지붕의 합각면은 거대한 풍판을 달아 외부로부터 벽면을 보호하고 있다.
대웅전은 1고주 5량의 구조로 건립되었다. 내부 고주 전면에는 불단을 만들고 이 위에 삼존불을 봉안했다. 중앙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셨고, 석가모니불 우측에는 관세음보살, 좌측에는 지장보살을 모셨다. 삼존불 뒤편으로는 후불탱화를 걸었고 삼존불 상부에는 닫집을 달았다. 닫집은 보궁형으로 만들어졌는데 닫집의 내외부에 포작을 달아 매우 화려한 모습이다. 삼존불이 모셔진 불단 오른편에는 하나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사찰에 전하는 바로는 달마대사의 상이라고 한다.
대웅전 내부 왼쪽에는 아미타불을 그린 탱화가 걸려있다. 화기에 의하면 1994년에 그린 탱화이다. 대웅전 내부 오른쪽에는 신중단이 만들어졌다. 신중단 상단에는 많은 신중의 모습이 묘사된 신중탱화가 걸려있다. 신중탱화의 화기에 의하면 1987년에 만든 것이다.
내부 천장은 빗천장과 우물천장을 조합해 만들었으며 바닥은 우물마루로 구성했다.
석가, 아미타, 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1771년에 개금한 기록이 전하지만, 현재는 석가불좌상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삼존상은 육중하면서 양감있어 보이며, 특히 하체의 다리부분은 더욱 두껍게 표현하여 안정감을 준다. 뒤에 봉안되어 있는 후불탱은 삼불(三佛)이 한 폭에 그려진 삼불회도(三佛會圖)이다.
삼성각에는 칠성, 독성, 산신을 모두 함께 모시는 전각이다. 조선시대 많은 사찰에서는 각각 다른 전각에 따로 봉안하거나 한분만 모시는 경우가 많았으나 근래에 들어서는 삼성각을 짓고 이곳에 세 분을 모두 모시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각연사의 삼성각은 1998년에 새롭게 만든 것이다. 평면은 정면 3간, 측면 2간으로 구성했으며, 어간과 협간의 크기를 같게 설정했다.
삼성각이 위치한 곳에 그리 높지 않은 축대를 쌓아 대지를 조성했다. 축대는 커다란 자연석을 허튼층으로 쌓아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만들었다. 축대 상부에는 2단의 기단을 쌓았는데 역시 막돌을 사용했지만 바른층으로 쌓았다. 초석과 댓돌 역시 막돌을 이용해 만들었는데 가장자리에 사용한 초석에는 쇠시리와 고막이가 새겨져 있어 원래 다른 건물에 사용했던 초석을 재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쇠시리와 고막이가 새겨진 초석으로 경우 대부분 신라시대에 많이 사용한 조형방식이다. 기둥은 원기둥을 사용했는데 흘림을 두지는 않았다. 공포는 익공식의 공포를 사용했는데, 초익공이다. 처마에 부연은 사용하지 않았으며 지붕은 맞배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25호 (1982년 12월 17일 지정)
대웅전 오른편으로 만들어져 있는 길을 따라 가면 또 다른 넓은 마당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곳에 비로전이 건립되어 있다. 비로전 상량문에 의하면 비로전은 1655년, 1899년, 1927년에 각각 중수한 바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 비로전은 현재 각연사 경내에 위치한 불전들 중 조성시대가 가장 앞서는 건물이다.
평면은 정면 3간, 측면 3간으로 구성되었다. 어간과 협간은 같은 크기로 설정되었다. 기단은 낮게 만들었는데 다듬은 돌을 이용해 한 단만 쌓았다. 초석은 매우 고식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초석 상부에는 쇠시리가 표현되어 있으며 고막이까지 확인된다. 비로전 건립 이전에 사용되었던 초석을 재사용한 결과로 판단된다. 기둥은 원기둥을 사용했는데 배흘림기둥을 사용했다. 배흘림기둥이라고 하나 흘림이 강하지 않게 구성했다. 기둥의 상부 창방과 결구되는 부분에서는 기둥의 외부면을 빗깍았다. 이를 편수깍기라고 하는데 오래된 고식의 수법이다.
공포는 다포식의 공포를 사용했다. 내외 모두 2출목으로 구성되었다. 살미의 쇠서를 수서형으로 구성했는데 조선초에 많이 사용하는 쇠서 구성방법이다. 처마는 홑처마로 구성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의 모양을 하고 있다. 비로전의 정면은 창호를 달아 모두 개방했으며 좌우측면에는 한 짝의 창호를 달아 출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배면에도 2개의 창호를 달았다. 정면과 측면의 창호는 빗살창호를 달았으며 배면의 창호는 판문을 달았다.
비로전은 1고주 5량의 구조로 건립했다. 고주 전면에는 낮은 불단을 조성했고 불단 안에는 석조비로자나불을 봉안했다. 비로자나불 뒤편으로는 후불탱화를 걸었는데 화기에 의하면 1979년에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비로전 내부 왼쪽 벽면에는 신중단을 만들었는데 신중단에는 신중탱화를 봉안했다. 비로전 내부 오른쪽 벽면의 경우 불단은 만들지 않았으며 벽면에 하나의 벽화를 그려넣었다. 벽화는 5불을 묘사하고 있다.
비로전의 천장은 연등천장과 우물천장을 혼용해 구성했으며 바닥은 우물마루로 꾸몄다.
대웅전 전면 왼쪽 마당에는 범종각이 세워져 있다. 1998년에 새롭게 만든 건물이다. 평면은 정면 2간, 측면 1간으로 구성했는데 정면의 간수를 짝수로 설정한 것이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범종각에는 따로 현판을 달지 않았으나 내부에 사물이 걸려있기 때문에 쉽게 범종각임을 알 수 있다.
기단은 곱게 다듬은 화강암을 이용해 만들었는데 그 높이가 그리 높지 않으며 한단만 쌓아올린 외벌대이다. 다듬은 돌로 기단을 조성한 반면 초석은 막돌을 이용했다. 그러나 막돌초석이라 하지만 상면은 비교적 평평하게 다듬어져 있다. 기둥은 원기둥을 사용했는데 흘림은 두지 않았다. 건물의 규모에 비해 두께가 얇은 기둥이다. 공포는 익공식의 공포를 사용했다. 전형적인 이익공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각 간마다 2개의 화반을 두어 도리의 처짐을 지지하고 있다. 가구는 가장 간단한 구조인 3량으로 구성했는데 중앙에 위치한 대들보에는 범종을 걸었다. 처마는 겹처마로 구성했고 지붕은 맞배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다. 맞배지붕을 만들면서 박공면에는 풍판을 달아 마감했다.
범종각 내부에는 사물이 모두 걸려있다. 범종에 기록된 명문에 의하면 범종은 1998년에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범종각 한 중앙에 범종을 걸었으며 왼쪽 간에는 법고를 두었고 오른쪽 간에 목어와 운판을 걸어 놓았다. |
대웅전 내 동편에 모셔져 있는 승려상은 이 절의 창건자 유일(有一)이라는 설과 중국의 달마(達磨)라는 설이 있다. 흙으로 만든 것으로 높이는 130cm 이며, 머리에는 건모를 썼다. 결가부좌를 한 양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손에 단장(短杖)을 들고 있는 대장부상이다.
보물 1295호 (1999년 6월 23일 지정)
고려 전기의 승려인 통일대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비로 각연사 동남쪽의 보개산 계곡을 따라 1㎞쯤 떨어진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탑비는 유명한 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대부분 부도와 더불어 짝을 이루어 위치하게 된다. 스님께서 입적하시면 좋은 자리를 찾아 장사를 지낸다. 장사를 지낸 후에 부도를 만들고 스님의 행장과 모든 제반 내용을 조정에 올리게 된다. 이를 받은 조정은 스님의 업적에 따라 탑비 건립 여부를 판단한 이후, 탑비에 새겨질 스님의 행장을 당대 최고 문장가에게 기술하게 하고 임금은 스님의 시호를 내리게 된다. 이후 시호와 문장을 사찰에 보내 탑비가 건립된다. 이런 연유로 탑비가 일반 승려라면 탑비가 남아있을리 없다. 대부분 당대 국사급의 고승 대덕만이 탑비를 갖게 되는 것이며, 이 탑비의 기록은 당대 불교사 연구에 있어서 핵심적이다. 그러나 탑비의 탑신이 남아 있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탑비가 부러져 사라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각연사의 통일대사 탑비는 탑신이 건립당시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탑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그리 많지 않다. 오랜 세월과 더불어 그 내용이 마모되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히 탑비의 내용 중에서 이 비가 통일대사(通一大師)의 탑비이며, 스님이 당나라에 유학하셨고, 고려 태조를 만난 일이 있으며, 대사가 입적하자 광종이 ‘통일대사’라는 시호를 내렸고, 당대의 문장가였던 김정언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였다는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비는 고려 광조 9년(958)에 건립되었다. |
사찰의 남동쪽 길을 따라 약 10여분 정도 가면 2기의 석종형 부도가 나타난다. 산으로 오를 수 있는 길 양쪽으로 한기씩 모셔져 있는데 2기 모두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길 왼편에 위치한 부도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선적당탑(善跡堂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선적당이 어느 시대에 활동하셨고,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하나의 통돌을 이용해 세부를 조각했는데 탑신 상부에는 상륜부를 조각해 만들어 놓았고, 상륜부에는 연꽃무늬를 조각했다.
또 하나의 부도는 높이가 약 106cm 정도의 높이를 갖고 있다. 기단위에 석종형의 탑신을 얹었고 그 위에 상륜의 형태를 조각해놓았다. 상륜은 총 3단으로 만들었으며 상부로 갈수록 그 폭을 줄여 마감했다. 부도에는 아무런 명문도 발견되지 않아 부도의 역사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비로전 동쪽에는 각연사 사적비를 받혔던 것으로 추정되는 돌거북(귀부)이 있다. 몸통만 남아 있으나 조각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비좌 옆면에 새겨진 안상이나 등껍데기, 목 둘레에 새긴 꽃잎, 발톱과 배 껍질 등이 아주 잘 표현되어 있다.
유려한 당초문은 인조 장릉의 조각 수법과 유사하여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
돌거북이 이 정도이면 비석이나 비석머리도 그에 걸맞게 훌륭했겠지만 행방을 알 수가 없다.
현재, 절 입구에 쌓인 옛 석재 가운데 부도나 석등의 지붕돌이었을 커다란 돌이 이 돌거북 근처에서 발견된다.
보물 1370호 (2003년 3월 14일 지정)
각연사 경내에서 남동쪽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30분가량 오르면 암자골 능선 중간 부분에 통일대사 부도라고 전하는 부도가 위치하고 있다. 이 부도는 1967년에 발견되었으며 당시 도괴되어 있던 것을 1982년에 다리 조립한 부도이다. 부도에 아무런 명분이 전하지 않아 어느 분의 부도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부도의 양식상 고려시대 초에 건립된 듯 하고 각연사 내에 통일대사 탑비가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건데 통일대사의 부도로 추정된다. 말각방형의 지대석 상부에 하대, 중대, 상대석의 기단이 얹어졌고, 기단 상부에는 팔각형 평면의 탑신석이 얹혀졌다. 탑신석 상부에는 모임지붕의 형태를 한 옥개석이 올려졌으며 상륜부는 결실되어 보이지 않는다. 탑신석의 모서리에는 기둥의 모양이 조각되어 있으며, 정면과 배면에는 문의 모습이 표현되었다. 옥개석의 모서리 부분은 끝으로 갈수록 높이 들어 올려 강한 상승감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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