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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청주박물관 갑옷 본문
음성 망이산성에서 발견된 백제시대의 갑옷이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안성군편에 '일죽면, 이천 및 충북 음성의 군계 마이산상에 있고, 석성으로서 3개 군에 걸쳐 있는데 본군에 속한 부분은 대략 3백간'이라 소개되어 있다. 『전국유적목록』에는 '일죽면 금산, 석성 부분 대개 3백간'이라 하여 앞의 자료를 요약하여 소개하였다. 『문화유적총람』에는 '금산산성. 안성군 일죽면 금산리 산 49번지에 신라 선덕여왕 때 백제군을 막기 위하여 쌓았다고 전해진다'고 하였다. 음성 망이산성의 내성을 형성한 작은 토루는 백제 초기에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석축의 외성은 치성과 성 안에서 수집된 토기 및 기와 등이 고구려 계통인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산성으로 추정된다. 또한 음성 망이산성의 동쪽 충주시 가금면 용전 입석에서 발견된 중원고구려비, 중원군 노은면에서 발견된 ‘건흥 5년(建興 五年) 세재병진(歲在丙辰)’의 명문이 있는 고구려 금동광배, 청원군 북일면 비중리에서 발견된 고구려계로 보이는 일광삼존불상 등을 볼 때 이 지역들과 음성 망이산성이 고구려의 점령 지역 안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음성 망이산성은 그 위치나 규모로 보아 고구려의 전방 중심 기지로 가장 적합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성은 신라 후기에서 고려시대의 유물과 건물 터가 많이 있는 걸로 보아 중세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양덕리에 이르는 산세는 거의 절벽이어서 아주 험하고 가파르나 뒤쪽인 북쪽은 한 단 낮은 계곡이 넓게 전개되고 그 주위를 성벽이 에워싸고 있어 남쪽의 적군을 대비하여 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높은 대지의 내주성에서 상대방을 감시하고 대적하는 군사가 진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뒤쪽 낮은 계곡에는 주력 부대가 주둔하여 많은 군사와 군마가 머물고 있었던 곳으로 추측된다. 서문 자리의 대지에서 남쪽으로 가면 또 한 곳의 대지가 전개되는데 그 서쪽 끝부분에는 망대와도 같이 튀어나온 대지를 성벽이 감싸고 있다. 축성 방식은 외벽을 높게 하여 적군을 방어하도록 하였으며, 내벽은 높지 않게 내부에 이르면서 평평하게 다져놓아 인마 통행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산성의 형식은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임을 알려준다. 현재 확인된 토성벽은 해발 450m 지점의 둘레를 따라 축조되었다. 내성의 북쪽에 움푹 내려앉은 부분이 있는데, 이곳이 문지(門址)로 추정된다. 내성 안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봉수대가 축조되어 있다. 외성은 둘레가 약 2㎞로서 산정부와 내성 북동쪽의 골짜기의 지세를 이용하여 만들었다. 장축 방향은 남북으로 되어 있으나 평면 형태는 지형에 따라 성벽을 연결하였기 때문에 방향이 일정치 않다. 성벽의 상단부가 모두 파괴되었기 때문에 여장(女墻)과 같은 방어 시설은 현재 확인할 수 없다. 외성의 문지로는 현재 서문지·남문지·북문지가 있다. 동문지는 현재 남아 있지 않으나 지형으로 보아 동쪽 계곡 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치성은 다섯 곳에서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들 치성들이 대부분 심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에 정밀한 조사를 하면 그 수가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외성 안에는 건물지로 추정되는 곳이 여러 군데 있으며 이들 건물지에서는 기와편들이 다량을 산포되어 있어 장대(將臺)·망대·창고·병사(兵舍) 등과 관련된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규모와 형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내성과 외성의 축성 방식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내성은 흙을 재료로 하여 쌓아올린 단순한 토성으로 동서 방향으로 길게 축조되었다. 내성의 흙 쌓기 방식은 내성의 성벽 가로 지름 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조사에서는 켜를 다져가며 쌓았던 판축의 흔적이 있으며 나무기둥을 사용한 흔적이 있다. 외성의 성벽은 대부분 가파른 산비탈을 이용하여 축조하여 성벽의 바깥쪽만 수직에 가깝게 성돌을 쌓는 바깥 면 쌓기[판축법]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 반면 안팎 면 쌓기[내외협축]의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외성의 안쪽에는 모든 구간에 걸쳐 일정한 너비를 가진 성벽 안쪽 통행로가 마련되어 있다. 이 길의 너비는 대개 3~4m 정도로, 사람 또는 말과 수레가 다니기에 충분한 공간을 두고 있다. 골짜기가 형성된 곳의 성벽 바깥 벽면은 긴 네모꼴로 다듬은 겉돌을 층층이 수평 눈금을 맞추면서 엇걸려 쌓고 겉돌 안쪽을 뒤채움돌로 메웠으며 여기에 흙을 보강하여 내탁하였다. 뒤채움돌도 그저 마구 쌓은 것이 아니라 높이에 비교하여 너비가 길고 중간 부분이 배부른 돌의 뒤쪽 끝이 벽면을 향하도록 하여 쌓았는데, 큰 돌 사이사이에는 작은 돌을 넣어 튼튼하게 하였다. 성돌의 크기는 성벽의 아래쪽일수록 크고 널찍하여 많은 무게를 잘 견디도록 하였으며 윗부분은 작고 가벼운 돌들을 사용하였다. 겉돌 가운데는 다른 것보다 긴 돌을 중간 중간에 끼워 넣어 그 끝이 뒤채움돌과 맞물려 성벽을 견고하게 지탱하도록 하였다. 바깥면석은 무너져 내려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면석은 위로 오르면서 성벽 안쪽을 향하여 물려쌓기를 하였다. 그래서 성벽의 겉모습이 아래쪽은 조금 완만하고 위쪽은 거의 수직을 이룬 홀(笏) 모양을 하고 있다. 치성은 산 능선부에 축조되었는데 성벽의 외벽에 맞물리도록 축조한 것과 덧대어 축조한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치성의 하단부가 아래쪽으로 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기단석 밑에 큰 석재로 보강한 흔적이 보인다. 석성은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부분이 많지 않으나 동북 방향 능선부의 치성과 동문지로 추정되는 지점 사이와 남문지에서 서북쪽으로 약 150m 떨어진 부분에 석축의 외벽이 보존되어 있는데, 장방형으로 다듬은 돌을 신자형(臣字形)으로 차곡차곡 올려 쌓았음을 잘 보여준다. 현재 성벽이 무너져 석축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구간에서도 외성 성벽 안쪽 통행로가 잘 남아 있어 성벽의 전체 테두리를 살피는데 도움을 준다. 문지가 남아 있는데, 이 문지들을 통과하여 지금도 주요 등산로가 나 있다. 동문지로 추정되는 부근에 돌로 축조한 우물이 현재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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