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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송읍 서평리 고억효자각(五松邑 西坪里 高億 孝子閣) 본문
동평들, 서평들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서쪽으로 조천천이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들말, 서평, 효자문이 있다. 들말은 서평 동남쪽 들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평은 마을이 들 서쪽이 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효자문은 효자 고억의 효자문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억의 효자각은 보영아파트 옆에 자리하고있다.
효자문을 빙 둘러친 철책 때문에 가까이 볼수가 없는 흠이 있다.
이 효자각은 조선 숙종 13년(1687)에 청주인(淸州人) 고억(高億, ? ~1662)의 효행을 기리어 나라에서 세운 정려이다.
지금의 효자각은 순조 5년(1805)에 건립하고 1982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1간 측면 1간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정려의 사면은 철제 홍살로 두르고 그 안에 효자문 편액을 걸었다.
1687년(숙종 13) 효행이 가상하여 조정에서 정문(旌門)이 내려졌고,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였던 이봉상(李鳳祥)[1676~1728]이 글을 지어 정려비(旌閭碑)를 세웠다. 현재 청원군 강외면 서평리에 효자정려비(孝子旌閭碑)가 남아 있다.
고억은 조선중기의 효자로서 청주 출신이며, 양민으로서 효행이 극진하였다. 어머니가 개가를 하였는데, 모친과 이부(異父)를 지극 정성으로 섬기었다.
나이 17세에 형을 대신하여 요동(遼東)의 역(役)에 나갔다. 이때에 봉림대군(鳳林大君)[뒤에 효종 임금]도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 요양에 있었다.
조선과 청나라의 협상으로 요동에 있던 조선 군사를 돌려보내게 되었다.
고억은 “세자저하와 대군을 두고 떠날 수 없다.”고 사배(辭拜)하였더니, 봉림대군이 “고국에 먼저 돌아가라.”고 역을 면제해 주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모친상을 당하자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삼년을 살았다. 그가 어려서 부친상을 당하여 그 정성을 다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더니 모친 묘소에서 삼년간을 더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 뒤 효종(봉림대군)이 승하한 뒤에 통곡하며 그 슬픔을 가누지 못하였다. 요동에서 역을 면하게 해준 성은(聖恩)때문이었다. 그는 매년 효종 임금이 세상을 떠난 날이면 향을 피우고 임금님이 계신 북쪽을 향해 재배(再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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