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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송읍 상정리 정평사(五松邑 桑亭里 靖平祠) 본문
오송읍 상정1리(桑亭里)에 있는 조선시대 사당이다. 상정1리 경로당에서 바라보면 바로 보인다.
오송읍은 청원군의 3개읍 가운데 하나로 청주군의 서쪽 미호천 바깥쪽이 되므로 서강외 일하면이라 하였다. 서쪽으로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에 접하고, 동쪽으로 미호천을 경계로 옥산면·강내면에 접한다. 면의 북부 지역에는 잔구성 산지가 다소 발달되어 있으나, 기타 지역은 낮은 평지로 충청북도 최대의 곡창지대인 미호평야의 중심부를 이룬다. 평야 남단부를 흐르는 미호천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천수천, 서쪽으로 조천이 흘러 관개에 유리하다. 쌀·보리 중심의 주곡농업이 이루어지며, 배추·오이·참외·수박·파·당근 등의 생산량은 충청북도에서 가장 많으며 면의 남부 미호천 연안에는 충청북도 최대의 낙농 단지가 조성되어 젖소 사육을 비롯해 육우·사슴·닭 등을 사육하고 있다. 남부지역을 충북선 철도 및 청주-조치원 간 36번 국도가 동서로 가로질러 인접 대도시와의 교통이 편리하다.[1]
오송생명과학단지와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청원군에서는 강외면을 읍으로 승격하는 것을 추진해 왔으며 주민 설문조사등을 통해 명칭을 '오송읍'으로 확정, 2012년 1월 1일 승격하였다.오송읍은 2000년에 승격한 내수읍, 2007년에 승격한 오창읍에 이어 청원군의 세 번째 읍이 되었다.
정평사는 조선 광해군 11년(1619)경에 치계(雉溪) 여우길(呂祐吉)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정평공(靖平公) 저곡(樗谷) 여칭(呂稱, 1351∼1423)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세원 함양여씨(咸陽呂氏)의 사당이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향하하고 있다.
지금의 사당은 1929년에 중건하고 1975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3간, 측면 1간반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분합문을 달고 앞퇴를 두었으며 마당 앞에 일각문을 세우고 벽돌담을 쌓았다.
그리고 마당에는 하천수(河千秀)가 짓고 여윤혁(呂運爀)이 쓰고 1972년에 세운 "함양여공신도비(咸陽呂公神道碑)"와
"사우중수기념비(祠宇重修記念碑)"가 있다.
저곡(樗谷) 여공(呂公)은 휘(諱)가 칭(稱)이고 자(字)는 중보(仲父)이다. 세상을 떠난 지 지금 3백 년이 되어 유풍(流風)이 아득하여 그 상세한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관직의 이력은 고신(告身, 직첩)에 대해 전하여 기록한 것이 있다.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이 개국한 해(1392년)에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제수되었고, 정종 대왕(定宗大王) 2년(1400년)에 병조 전서(兵曹典書)에 제수되었다. 태종 대왕(太宗大王) 4년(1404년)에는 동북면(東北面) 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 겸 도병마절제사(都兵馬節制使)에 제수되었다. 태종 대왕 7년(1407년)에는 개성유후사 유후(開城留後司留後)에 제수되었다. 태종 대왕 13년(1413년)에는 좌군도총제부 도총제(左軍都摠制府都摠制)에 제수되었다.
≪여지승람(輿地勝覽)≫ 함양군(咸陽郡) 인물(人物)편을 보면 ‘여모(呂某)는 벼슬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에 이르렀다.’ 하였다. 그 인품과 정사(政事)에 대해서는 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에 제수되었을 때의 교서(敎書)가 있는데, 개략해보면 “생각건대, 경(卿)은 방정(方正)하여 지킴이 있고, 강직하여 간사하지 않다. 이치(理致)에 숙련되고 통달하여 아름다운 명망이 실로 많고, 문(文)으로 꾸며 아름다운 명성이 일찍이 퍼졌다. 부절(符節, 부신(符信))을 양분하여 교화를 펴고 부절에 기대서 풍속과 인정을 살폈다. 그래서 승추부(承樞府)의 녹질(祿秩)로서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었다. 번거롭고 힘든 일로 두루 시험해 보았으나 누차 공적을 쌓았고, 타국에서 전대(專對, 타국에 사신가서 군명(君命)을 완수함)함에 사명(使命)을 욕되이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 겸 도병마절제사(都兵馬節制使)에 제수하노라.” 하였다.
그 생애는 고찰할 수 없지만, 그 졸(卒)한 시기는 세종 대왕(世宗大王) 5년(1423년)이며, 나라에서 제문(祭文)을 보낸 바, 그 칭양한 말은 대략 순문(巡問)에 제수할 때의 교서와 같다. 그 문말(文末)에 또 ‘만년에 한가롭게 집에서 쉰 것이 몇 년이나 된다.’ 하였고, 보첩(譜牒)에서는 ‘개성 유후(開城留後)로서 본부(本府) 뒤의 서강(西江) 압해정(壓海亭)으로 은퇴하여 쉬다가 졸하였다.’ 하였다.
조부는 밀직 부사(密直副使) 휘(諱) 공계(公係)이다. 아버지는 선관서 영(膳官署令)으로서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에 추증된 휘 언손(言孫)이다. 어머니는 경주 설씨(慶州薛氏)이니, 중대광(重大匡) 양원군(楊原君) 설돈(薛惇)의 딸이다. 전 부인(前夫人)은 남양 홍씨(南陽洪氏)이니, 자식이 없었다. 후 부인(後夫人)은 언양 김씨(彦陽金氏)이니, 도관찰사(都觀察使) 김수익(金受益)의 딸이다. 장남은 좌랑(佐郞) 여계(呂稽)이며, 차남은 현감(縣監) 여재(呂賫)이다. 장녀는 부사(府使) 신계삼(辛季參)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박경무(朴景武)에게 출가하였다. 여계의 아들은 현감 여종숙(呂宗肅)이다. 그 이후로부터 가문이 더욱 번창하여, 혹 무(武)로써 벼슬에 나아가기도 했지만, 역시 문(文)에 적(籍)을 둔 이가 많았다. 증손은 판서 여자신(呂自新)이고, 현손은 절도사 여윤철(呂尹哲)인데, 부자(父子)가 연달아 청백(淸白)으로 유명하여 모두 청사(靑史)에 기록되었다. 8대손으로는 우윤(右尹) 여유길, 관찰사 여우길(呂祐吉), 도정(都正) 여인길(呂吉)이 있다. 9대손으로는 참판 여이징(呂爾徵), 판서 여이재(呂爾載)가 있다. 10대손으로는 영의정 여성제(呂聖齊), 장령(掌令) 여증제(呂曾齊), 집의(執義) 여민제(呂閔齊), 부사(府使) 여윤제(呂尹齊)가 있다. 그리고 11대손으로는 승지(承旨) 여필용(呂必容), 장령 여필중(呂必重)이 있는데, 바야흐로 조정에서 중요하게 쓰이고 있다. 공의 위엄과 아름다움은 비록 그 상세한 것을 들을 수 없지만, 지금 후손을 덮어주는 경사로써 몸소 힘써 노력한 덕을 상상해 볼 수 있겠다. 아! 아름답도다.
장지(葬地)가 개성부(開城府) 대정리(大井里)에 있는데, 짧은 묘표(墓表)로 관호(官號)만을 기록했을 뿐, 사적에 대해서는 기술한 것이 없다. 공의 묘 아래에 묘가 하나 더 있는데, 전하기로는 김 부인(金夫人)의 묘라고 하나, 증거가 없기에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없는 형편이다. 지금 여필중이 참으로 먼 조상을 추모하는 정이 깊어서, 그 오래 될수록 사적이 더욱 인멸될까 크게 두려워한 나머지, 비갈(碑碣)을 세워 후손들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루는 나에게 “우리 조상이 명을 받고 동북면(東北面)으로 갈 때, 그대의 선조(先祖)인 귀정(龜亭) 충경공(忠景公, 남재(南在))이 전송하면서 시(詩)를 지었고, 거기에 ‘풍속은 바로 곧 교화하는 것이 어렵지만, 그대의 덕이 풍속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으니, 그 허여(許與)의 정분(情分)을 알 수 있겠다. 옛 덕을 생각하고 또 선조의 사이가 좋았던 것을 생각하여, 그대에게 문자(文字)의 일을 부탁한다.” 하였다. 아! 두 공이 동료로서 조정에서 활동한 것이 3백 년 전의 일인데, 아득한 후손들이 지금 또 집안간에 잘 지내고 있으니, 어찌 마음에 척척(戚戚)함이 없으리요? 나는 이에 감히 글을 짓지 않을 수 없어, 마침내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여씨(呂氏)의 선대는 당(唐)나라 내주(萊州) 사람이다. 동방으로 와서 함양을 본적으로 삼게 된 것은 황소(黃巢)의 난(亂) 때문이다. 보첩(譜牒)의 기록은 대장군(大將軍)에게서 시작되고 있다. 아득한 그 시초여, 대대로 인(仁)을 닦았네. 공이 특출하게 태어나 성군(聖君)을 만나 중외(中外)를 출입하면서 경륜을 칭송받았네. 네 임금을 섬기며 총은(寵恩)을 받았고, 나이가 많아짐에 늙음을 고하여 물러나서 구원(丘園)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한가로이 살았네. 관락(寬樂)으로 끝을 아름답게 맺으시고, 후손들에게 넉넉함을 드리우셨네. 남은 경사 유장(悠長)하여 나라와 더불어 끝이 없으니, 공경(公卿)이 배출되고 벼슬이 끊임없는바, 그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실로 공의 충근(忠勤) 때문이로다. 먼 조상을 추모하는 데 독실한 어진 후손이 있나니, 비석에 글을 새겨 그 명성을 영원하게 하네.
여칭 [呂稱] (국역 국조인물고,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정평사 앞에는 숭모재(崇慕齋)라는 현판을 달고 현대식 건물의 재실이 자리하고 있다.
본관은 함양(咸陽) ·성주(星州)의 2본이다. 문헌에는 30여 본이 전하나 대부분 함양여씨와 성주여씨의 세거지(世居地)를 나타낼 뿐이다. 여씨의 선조는 본디 당나라 사람으로, 877년(현강왕 3)에 황소(黃巢)의 난을 피해 신라에 귀화하였다고 전한다. 그뒤에 함양 ·성주 ·밀양 ·김해(金海) 등 4본으로 분적했다고 하는데, 오늘날 밀양여씨와 김해여씨는 전하지 않는다. 함양여씨의 시조는 고려시대에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낸 어매(御梅)이며, 그의 9대손인 칭(稱) 이후 많은 명신을 배출하였다. 칭은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 조선 태조 때 도총제(都摠制) ·형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청빈하기로 이름났다. 그의 증손 자신(自信)은 성종~중종대에 걸쳐 이름난 무신으로 병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함양여씨는 칭의 8대 손인 우길(祐吉) ·유길(裕吉)의 대를 고비로 선조~숙종대에 걸쳐 가장 위세를 떨쳤다. 우길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광해군 때 관찰사에 이르렀는데, 대명외교(對明外交)에 공헌하고 임진왜란 뒤에는 일본에 건너가 중단된 국교를 회복시켰다. 독립운동가 운형(運亨)은 우길의 11대손이다. 유길은 선조 때 알성문과에 급제, 광해군 때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유길의 아들 이징(爾徵)은 인조 때 문과에 급제, 대사헌 ·도승지 ·부제학 등을 지냈는데 성리학에 밝고 천문 ·역법(曆法) ·시문 ·서화에도 뛰어났다. 또 그의 종제(從弟) 이재(爾載)는 인조 때 문과에 급제, 심기원(沈器遠)이 모반했을 때 공을 세워 영국공신(寧國功臣)에 책록되고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함양여씨의 유일한 상신 성제(聖齊)는 소론(少論)의 한 사람으로서 영의정에 이르렀다가, 남인(南人)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소(辭疏)를 올린 끝에 중추부판사로 전임하였다. 한편 성주여씨의 시조는 고려시대에 진사를 지낸 양유(良裕)이며, 성주여씨의 대표적 인물로는 희림(希臨)을 들 수 있다. 그는 중종 때 진사시에 합격, 왕자사부가 되었는데 당대의 학자로서 이름이 높았다. 여씨는 조선시대에 문과급제자 51명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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