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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송읍 정중리 이도명충신각(五松邑 正中里 李道命忠臣閣) 본문
오송읍 정중1리에 위치하고 있는 이도명의 충신각이다.
이 효자각은 조선 철종 8년(1858)에 완산인(完山人)이도명(李道命)의 효행을 기리어 세운 정려이다.
지금의 효자각은 1987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1간, 측면 1간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정려의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 효자문 편액을 걸었다.
이도명(李道明)은 본관은 완산(完山)이며 자는 토통(土通)이다.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가마리(駕馬里) 출신으로 이민의(李敏義)의 아들이다. 1728년(영조 4) 청주에서 이인좌의 난(李麟佐─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반란군과 싸워 지평(持平)에 증직되었다. 1870년(고종 7) 효행으로 청원군 강외면 정중리(正中里)에 효자각(孝子閣)이 세워졌다. 묘소는 청원군 남이면 가마리(駕馬里)에 있다.
가마리에는 완산이씨의 사당인 충신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완산인 이민핵의 신도비와 충신각이 자리하고 있다.
[가마리에는 완산이씨의 사당인 충신사가 자리하고있다]
[완산인 이민핵 신도비]
[완산인 이민핵의 충신문이다]
이인좌의 난은 조선 후기 이인좌 등의 소론(少論)이 주도한 반란이다.
일어난 해의 간지를 따서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한다. 소론은 경종 연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노론과의 대립에서 일단 승리하였으나, 노론이 지지한 영조가 즉위하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박필헌(朴弼顯) 등 소론의 과격파들은 영조가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죽음에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 탄(密豊君坦)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남인들도 일부 가담하였다.
한편 이들의 거병에는 유민(流民)의 증가, 도적의 치성, 기층 민중의 저항적 분위기가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반군은, 지방의 사족과 토호가 지도하고 중간계층이 호응하며, 일반 군사는 점령지의 관군을 동원하거나 임금을 주어 동원하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이인좌는 1728년(영조 4) 3월 15일 청주성을 함락하고 경종의 원수를 갚는다는 점을 널리 선전하면서 서울로 북상하였으나 24일에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 격파되었고, 청주성에 남은 세력도 상당성에서 박민웅(朴敏雄) 등의 창의군에 의해 무너졌다. 영남에서는 정희량(鄭希亮)이 거병하여 안음·거창·합천·함양을 점령하였으나 경상도관찰사가 지휘하는 관군에 토벌당했다. 호남에서는 거병 전에 박필현 등의 가담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난의 진압에는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 등 소론 인물들이 적극 참여하였으나, 이후 노론의 권력장악이 가속화하였고 소론은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정부에서는 지방세력을 억누르는 정책을 강화하였고 토착세력에 대한 수령들의 권한이 커져갔다. 또한 이때 반군이 군사를 동원한 여러 방식은 뒤의 홍경래의 난으로 이어졌다.
이인좌는 충청병사 이봉상과 그의 비장이었던 홍림을 그 자리에서 죽이고, 영장 남언년에게 항복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가 말을 듣지 않자 그 역시 죽인 후에 스스로 대원수라고 지칭하였다. 그들은 ‘경종의 원수를 갚는다’는 점을 널리 선전하면서 서울로 북상하였고, 신천영은 가짜 병사를 칭하며 북상하였다. 그러나 24일에 안성과 죽산에서 도순무사 오명항과 중군 박찬신 등이 거느린 관군에게 격파되었다. 청주성에 남아 있던 세력도 상당성에서 박민웅 등의 창의군에 의해 무너졌다. 영남에서는 동계 정온의 후손인 정희량이 거병하여 안의와 거창 그리고 합천, 함양을 점령하였으나 경상도관찰사가 지휘하는 관군에 토벌되었다. 호남에서는 거병 전에 호남을 책임지기로 했던 박필현 등의 가담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청주에는 이인좌의 난과 관련된 인물들의 자취가 이곳 저곳에 많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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