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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면 몽촌리 영등사(沼壽面 夢村里 永登寺)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소수면 몽촌리 영등사(沼壽面 夢村里 永登寺)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4. 6. 24. 06:23

 

 

 

 

요즈음은 혹여나 놓친 옛님들이 계시려나 하고 전국문화유적총람을 중심으로 샅샅이 살펴보는 중이다

괴산지역에서 면 단위별로 찾아보다가 몽촌리에 영등사라는 절에 고려시대의 석불이 있다는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영등사(永登寺)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은 소수면 몽촌리 능안마을 뒷산 일명사지(逸名寺址)에 있었는데 1930년대 사지(寺址) 아래에 새로 세운 영등사로옮겨 주존불(主尊佛)로 모시고 있어 지금은 영등사 석조여래좌상이라 부른다. 오른손을 배 앞에 붙치고 왼손을 가슴으로 올린 높이 90cm의 이 좌상은 얼굴과 두 팔을 시멘트로 보수하였으나 나발(螺髮)의 머리에 큼직한 육계가 있고 백호는 없으나 두 귀는 길어서 어깨에 닿고 목이 짧아 삼도(三道)가 없는 듯하다.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는 양팔에 걸쳐 아래로 흘렀는데 태조(太彫)가 유려하지 못하다. 이 석불좌상(石佛坐像)은 고려 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전국문화유적총람]

 

 

 

여러번 다닌곳이지만 영등사라는 사찰이 눈에 익지 않다.

속는 셈 치고 찾아나 볼까 하는 마음에 길을 나섰다

 

몽촌리는 백마산 밑 높은 지대이며, 上古(상고)때 유명한 이가 살았으므로 꿈이 변하여 몽촌이 되었다 한다. 자연마을로는 안골, 골말, 능안, 행낭말 등이 있다. 안골은 몽촌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능안은 능기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행낭말(교동)은 안골 동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에 부잣집에서 행낭채를 많이 지어 붙은 이름이다.

소수면은 살구나무가 가로수길을 이루고 있다.도로위를 뒹구는 살구들이 지천이다

농촌인구의 고령화와 농번기등으로 인하여 살구도 수확할수가 없는 듯 길위로 살구들이 뒹굴고 있다

여느 농촌마을 처럼 사람들의 모습이 보기가 힘들다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았지만 별 소득이 없다 죽으라는 법은 없는 법

마침 지나가는 차가 있어 물어보니 동네 토박이이신 듯 영등사는 에전에 폐사되였다고 알려준다

공비침투등에 은신처를 없애기 위하여 화전민촌등을 정리할 때 영등사도 페사되였다고 알려주신다

혹여나 석불좌상에 대하여 여쭤보니 절이 폐사된후 한동안 있었는데 목도 부러지고 그후로 어떻게 되였는지 모르겠다고 일러준다

지금은 절의흔적도 찾을수 없을거라 한다 한동안 석불이 있었다고 하니 겨울에 한번 방문해 봐야 할것 같다

지금은 녹음이 우거져 볼수도 없을것 같으니 말이다

 

 

소수면은 충청북도 괴산군 북서쪽에 위치하며 북으로 음성군과 접하고 있는 면이다. 면의 가운데에 설우산이 자리 잡고 있고 동진천, 고마천이 면을 양분하며 흘러 달천에 합류한다. 현재 수리 · 입암리 · 아성리 · 고마리 · 소암리 · 몽촌리 등 8개의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면 소재지는 수리이다.

조선 시대까지는 군의 북중면(北中面)이었다. 『여지도서』에서는 북중면에 속하는 탄동리(炭洞里) · 가성리(加城里) · 지선리(止善里) · 입암리(笠巖里) 등 4개 리의 위치와 인구를 적고 있다. 『해동지도』에는 이도면과 북상면 · 북하면으로 둘러싸인 곳에 북중면이 위치하고 있다. 『괴산군읍지』(1902)에서는 북중면과 북하면을 합쳐 북중하면(北中下面)의 관할 리로 토옥(圡沃) · 지선(止善) · 수동(壽洞) · 항동(項洞) · 신기(新基) · 강창(江倉) · 개오개(介五介) · 모내일(毛乃一) 등 9개 리가 나온다. 1914년 북상면의 몽촌 · 소암 · 고마 등 일부 리와 북하면의 항동 등 일부 리, 남상면과 이도면의 일부 리를 합쳐 소수면(沼壽面)이 되었다. 이 지명은 북중면 소재지였던 소암리(沼岩里)와 북중면의 소재지였던 수동(壽洞)에서 따온 것이다.

수리(壽里)는 본래 군의 북중면에 속했던 수동(壽洞)에서 유래한 지명인데, 숫골이라고도 불리는 동진천 가에 위치한 마을 이름이었다. 1914년 지선리(止善里) 일부와 북하면의 노동(老洞) · 항동(項洞) 일부를 합쳐 수리라는 법정리가 되었다. 고마리(叩馬里)라는 지명은 조선 세조 때 문신 허후(許詡)가 세조의 찬탈을 간언하였다가 화를 당한 이후,

'고마이간(叩馬而諫:충신의 간언이란 의미 의 고사성어)

'이란 뜻을 따 고마동 또는 고말기라 불렀는데, 이 곳에 허후의 묘소가 있고 그 자손들이 살았다. 아성리(阿城里)는 조선 시대 군의 북상면에 속한 곳으로, 작은 재가 있어 아재 · 애재 · 아성이라 부른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괴산군읍지』(1902)의 지도에도 북상면 오른쪽으로 그려진 산줄기에 아리현(阿里峴)이라는 지명이 쓰여 있다. 입암리(笠岩里)는 갓바위가 있어 갓바우 또는 입암(笠岩)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몇번을 생각으로만 그치다가 능안골을 찾았습니다

능안골은 몽촌리를 조금 지나 신촌마을에서 들어가야 합니다

유근의 묘지가 있는곳이라 하여 능골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니 능보다 안에 있는 곳이라 하여 능안골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나 봅니다

신촌마을회관에서 동네 어르신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아마 절의 흔적도 없을거라고 이야기를 해주시네요

당신도 어린시절에 몇번 가보고 지금은 흔적도 없을거라고 ....

그래도 한번 걸음이나 해본다고 대충 약도를 그려가지고 찾았지만 절의 흔적은 찾을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또 영등사라는 절과 함께 석불의 흔적도 시간속으로 스러지는 것 같습니다(2019년12월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