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오송읍 강외면 연제리 박훈유허비(五松邑 江外面 蓮提里 朴薰遺墟碑) 본문

통합청주시/흥덕구(興德區)

오송읍 강외면 연제리 박훈유허비(五松邑 江外面 蓮提里 朴薰遺墟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4. 12. 22. 19:29

오송읍 강외면 연제리에 있는 모과공원은 한참 개발중인 오송읍의 한켠에 자리하고있다

이름이 공원이지 찾는날은 추운 겨울이여서 그런지 공원을 찾는이는 없고 조금은 썰렁하다는 느낌이였다.

 

공원의 이름에서도 나타나 듯 오래된 모과나무가 정다웠던 동네의 지난 추억을 이야기를 되새기는 듯 했다.

천연 기념물로 지정된 오래된 모과나무가 지키고 있는 곳 그 곳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을까?

 

현재  모과공원의 주소는 오송읍 연제리 647번지 이며 서흥캅셀공장뒤에 위치하고 있다.

 

유허(遺墟)란 유지(遺址)·유적(遺蹟)·구기(舊基)와 같이 ‘남긴 터(자취)’·‘옛터’의 뜻으로, 여기에서는 선현들이 태어났거나 살았거나 임시 머물렀던 곳,

또는 순절(殉節)하거나 귀양살이하였던 곳을 가리킨다.

 

 

고려시대까지는 유허비라는 명칭의 비는 보이지 않으나, 조선시대에는 유허비를 비롯하여 유지비(遺址碑)·구기비(舊基碑)라는

명칭의 비가 적지 않게 조성된다.

 

비석의 전면에는 문도공강수박선생휘훈유허(文度公江叟朴先生諱薰遺墟)라고 음각되여 있다.

이 곳 연제리는 밀양박씨 中始祖 文度公 朴薰이 조선 中宗때 己卯士禍를 당하여 유배생활을 마친 후 中宗 28년(1533)에 이 마을로 낙향하여 정착한 이래 密陽朴氏의 집성촌이 되었다.

이 곳 연제리는 모과나무가 많다고 하여 모과울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기도 하였다. 모과울은 밀양박씨가 대성으로 아마 박훈의 유허비도 밀양박씨에

세거지에 세운것이 아닐까 한다.

 

 

특히, 구기비라는 용어는 왕족들에게만 한정되어 사용되었던 점이 주목된다. 이와 같이, 유허비·유지비·구기비는 입비 장소가 중시된다는 점에서 지연적 성격이 강하지만, 이를 통하여 선현의 뜻을 기린다는 점에서 송덕의 성격도 강하다.

따라서, 공덕비(功德碑)·의열비(義烈碑)·정려비(旌閭碑) 등과 내용상 크게 구별되지 않으며, 넓은 의미에서는 사실의 내력을 적어 길이 후세에 남긴다는 뜻에서 기적비(紀績碑·紀蹟碑) 또는 사적비(事蹟碑)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하겠다.

 

 

 

 

오송읍 강외면 오송단지내에 위치하고있는 모과공원내에 위치하고 있는 박훈의 유허비이다.

박훈의 묘지는 옥산면 신촌리에 위치하고 있다

 

 

박훈은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형지(馨之), 호는 강수(江叟). 좌찬성 중손(仲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간 미(楣)이고, 아버지는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증영(增榮)이다. 어머니는 현감 박영달(朴英達)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06년 천거로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를 거쳐,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외지로 나갔다. 그러나 어진이를 임금 곁에 두지 않고 외직으로 내보내는 것은 잘못이라는 여론에 따라 사헌부감찰로 바뀌었다가 공조좌랑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다.

1519년(중종 14)에 현량과(賢良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사간원사간 등을 거쳐 동부승지에까지 올라 ‘국기(國器 : 나라에 인재가 될만한 그릇)’라는 명성을 들었다.

그러나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화를 입어 성주에 유배되었다. 이후 의주로 옮겨졌다가, 13년 뒤에 안악으로 옮겨졌다. 3년 뒤인 1533년에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향리인 청주에 은거하였다.

어머니가 죽자 상주노릇을 너무 슬프게 하다 병을 얻어 일생을 마쳤다. 효심뿐 아니라 성품과 자질이 순수하고 덕행과 기량이 자연히 이루어져 행동에 지조가 굳고 법도가 있었다. 또 마음에 있지 않아도 관대하고 화합하는 도량도 갖추었다.

당대 큰 선비들과 두루 사귀었고, 특히 조광조와는 가장 친하였다. 조광조가 도목정사(都目政事 :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매기던 제도) 때 그의 의견에 따라 승진시키거나 내칠 정도였다 한다.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에 제향되었으며,시호는 문도(文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