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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묵당 주련시.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취묵당 주련시.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1. 8. 17:21

 

괴산읍 능촌리 괴강가에 자리잡고 있는'취묵당'에는 누정 이름을 적은 편액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취묵당 중수기'와 '취묵당' 단어가 들어간 한시가 걸려 있어 이 누정이 취묵당임을 알게 한다.

취묵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통칸마루 사방에 난간이 설치돼 있다. 그리고 4개의 기둥에는 '용호'라는 주련(柱聯) 시가 걸려 있다.

주련은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로, 기둥(柱) 마다 시구를 연하여 걸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생기복덕(生氣福德), 덕담(德談) 등의 내용을 붓글씨로 써서 붙이거나 그 내용을 얇게 새겨서 걸기도 한다.

또 오언이나 칠언의 유명한 시나 자작한 작품을 써서 거는 경우도 많다. 한 구절씩을 적어 네 기둥에 걸면 시 한 수가 완성된다. 취묵당에 걸린 백곡의 주련시 '용호'의 내용이다

 

 

 

'고목에는 찬 안개가 감돌고(古木寒煙裏) 

가을 산에 소나기 흩뿌리네(秋山白雨邊) 

저무는 강물에 풍랑이 일어나니(暮江風浪起) 

어부는 서둘러서 뱃머리를 돌리누나(漁子急回船).-<백곡집>

18세기 인물인 안정복(安鼎福·1712∼1791)은 이 시에 대해 '효종이 "당인(唐人)에게 부끄럽지 않다"며 화공을 시켜 이 시를 써주고는 대궐의 병풍을 그리게 하였다'고 서술했다. 이때의 '당인'은 중국 당나라 사람을 일컫는다. 굉장한 칭찬이 아닐 수 없다.

김득신의 집안은 대대로 남인계열이었고, 당시 집권층은 노론이었다. 노론은 이 시를 문제삼았다. 일종의 필화사건으로, 한문학자 이가원(李家源)은 '조선문학사'(1997)에서 이렇게 적었다.

'백곡을 미워하는 老黨들이 그를 비방하여 '古木寒雲', '秋山白雨'와 '暮江風浪'을 당시 국정의 쇠퇴를 비유한 시어로 보고, '漁子急回船'을 백곡 자신의 恬退(염퇴)에 비유했음이라고 하였으나, 숙종이 이를 하나의 驟人(취인) 즉흥시로 간주하여 화를 면했던 시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시이기도 하다.'-<『조선문학사 』837쪽>

고목, 추산, 모강은 분명히 쇠락을 느낌을 주고 있다. 게다가 한운, 백우, 풍랑은 쇠락을 이미지를 더욱 심화시키면서 당시 정국을 묘사한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어부의 급박한 행동은 남인 백곡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정치적으로 공격의 빌미가 됐으리라는 짐작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김광수 씨는 논문「김득신의 시론과 시의 관련 양상 연구」에서 '이 시는 정치적인 비유를 담은 시라기 보다는 자연을 읊은 즉흥시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날씨는 차갑고 비가 오는데, 날도 저물어 풍랑까지 치는 상황은 자연 변화의 한 모습일 뿐'이라며 '이런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어부의 행동은 천연적인 본능에서 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적었다.

백곡의 이 시는 우리지역 입장에서 보면 다소 아쉬운 면이 있다. 이 시가 지어진 공간적인 배경은 언뜻 생각하면 괴강 주변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서울 한강의 용산 주변이다. 제목 '용호'는 용산앞 한강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기회에 취묵당 주련시를 괴강 주변을 노래한 팔영시(槐峽醉默堂八詠)로 바꿨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충북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