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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일면 지북동 경대승묘소(南一面 池北洞 慶大升墓所)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남일면 지북동 경대승묘소(南一面 池北洞 慶大升墓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2. 8. 11:27

 

경대승 하면 무인정치 하고 머릿속에 떠오른다. 경대승은 누구인가?

경대승의 묘가 있다는 지북동에 있는 청주경씨의 묘역을 찾아보았다.

지북동의 청주경씨의 묘역을 문화재로 지정한다는 소문에 주위 지북동 주민들의 반발이 많다.

아마 문화재로 지정되면 문화재 구역에 묶여 재산권 행사등에 많은 제약사항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가 상생할수 있는 좋은 타협점을 찾아야 할것 같다.

 

 

경대승에 대하여 알기위해서는 먼저 무신의 난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한다.무신의 란의 시발점은 고려 1170년(의종 24) 8월에 대장군(大將軍) 정중부(鄭仲夫)와 견룡행수(牽龍行首)·산원(散員) 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이 국왕의 보현원(普賢院) 행차 시에 순검군(巡檢軍)을 모아 호종한 문관과 대소신료 등을 살해함으로써 시작된 것이 무신란이다. 표면적으로는 김부식(金富軾)의 아들 김돈중(金敦中)이 대장군인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운 일이나, 젊은 문신 한뢰(韓賴)가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도화선이 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무신란의 배경에는 무관을 경시하고 문관을 우대하는 고려의 우문정책이 있었다.

제도적인 면에 있어서 무반은 정3품인 상장군을 최고직으로 하고 있어서 그 이상의 승진이 어려웠고, 최고위직인 재추직은 문반이 독차지하도록 되어 있었다. 게다가 군대의 최고 통수권조차 문신들에게 있었다. 상원수가 되어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강감찬(姜邯贊)은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문신이었고, 여진족을 물리치고 9성을 쌓은 윤관(尹瓘), 묘청의 토벌시 군사령관직을 맡았던 김부식 역시 문신이었다. 이렇듯 무신들은 같은 관직 체계 안에 있었으면서도 제도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문신에게 차별을 받았다. 앞의 사건 등은 문신들에게 팽배해 있던 무신들에 대한 멸시나 천대를 잘 보여준다. 여기에다 의종은 경박한 문신 및 환관들과 유락(遊樂)을 일삼으면서 호화롭고 사치스런 날을 보내기 일쑤였다. 따라서 정치기강이 문란해져 무신들에 대한 천대도 극도에 달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분위기는 사회곳곳에서 감지될 정도로 팽배해있었던 듯 하다. 《고려사》 열전 유자량(庾資諒) 전에는 그가 유가의 자제들과 계를 하면서 무인인 오광척(吳光陟)과 문장필(文章弼)을 가입시키려다가 계원에 반대에 부딪치자 무인들의 가입을 거절하면 후회가 있을 것이라는 말로 계원들을 설득시켜 두 사람을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무신란 때에는 과연 그들에 힘입어 계원 모두가 무사했다는 기사도 전한다.

그러나 의종은 이러한 분위기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계속 문신들과 어울렸으며 결국 거사 당일 보현원에 행차함으로써 이 발생한 것이다. 이때  정중부 등 주동자들은 사람을 시켜 ‘무릇 문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胥吏)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고 외쳐 선동하며 거의 모든 요직의 문신들을 죽이고 왕마저 폐위하고 왕제인 익양공(翼陽公) 호(晧)를 국왕으로 삼았다. 이 사람이 바로 19대 임금인 명종(明宗)이다. 이때가 바로 1170년이고 이로부터 정권은 자연히 무신들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지북동 청주경씨 묘역에는 경대승의 묘로 추정하여 만든 경대승의 묘가 있다. 묘역입구에는 신도비도 세워 놓았다.

 

청주경씨의 시조는 청주인 경진(慶珍)으로 고려 명종 때에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냈으며 그 아들인 경대승(慶大升)은 청렴한 인물로 장군이 되어 정중부의 횡포정치를 제압하고 쇄신정치를 하였다.

 

청주경씨의 1세(世)는 경번(慶蕃)으로 고려 고종조에 문과에 올라 호부상서평장사에 이르고 청주에 세거하였으며 2세는 경유(慶緌)로 통례문사를 지내고 3세인 경사만(慶斯萬)은 우대언(右代言)이었고 4세 경복흥(慶復興)은 벼슬이 문하시중에 오르고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청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경대승()은 청주( :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사람으로 부친 경진()은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냈다. 경대승은 완력이 남보다 빼어났고, 일찍부터 큰 뜻을 품고서 집안의 살림살이는 돌보지 않았다. 나이 열다섯에 음서로 교위()에 임명되었고, 여러 차례 승진해 장군이 되었다. 부친 경진은 성질이 탐욕스럽고 비루해 남들의 땅을 많이 빼앗았는데, 그가 죽자 아들 경대승은 전안( : 으로 토지대장)을 모조리 선군()에 바치고 한 점도 자기 것으로 하지 않자, 사람들이 그의 청렴에 탄복하였다.

명종 8년(1178) 청주 출신으로 개경에 적()을 두고 살다가 낙향한 사람들과 원주민 사이에 분쟁이 벌어졌다. 원주민들이 낙향한 사람들을 거진 다 살해하자, 개경에 남아있던 청주 출신자들이 소문을 듣고 복수하려고, 왕의 교서를 위조해 결사대를 모은 다음 청주로 향했다. 왕이 장군 한경뢰() 등을 추격대로 보내 제지하도록 했으나 따라잡지 못했다. 결국 개경에서 내려간 자들이 청주 사람들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사망자만 백여 명이 났다. 당시 경대승과 대장군 박순필()이 청주의 사심관()으로 있으면서 이를 제지하지 못했으므로 파직되었으며, 청주목부사(使) 조온서()도 파면되었다.

경대승이 일찍이 정중부()가 발호하는 것을 분하게 여겨 그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몄으나 중대하고 어려운 일이라 은인자중하고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당시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은밀히 공주()와 혼인하려는 계략을 꾸미므로 왕이 이를 우려하고 있었다. 경대승이 정중부를 살해하려는 뜻을 굳혔으나, 그의 사위 송유인()을 겁내 틈을 얻지 못하고 있던 차에 송유인이 문극겸()·한문준()을 몰아낸 일로 크게 인심을 잃었으며, 조정의 관료들도 모두 그를 혐오하게 되었다. 견룡군() 허승()은 용력이 있어 사람들을 굴복시켰으므로, 정균이 그를 좋아했으며, 경대승도 허승과 대정() 김광립()·준익()과 서로 친한 사이였다.

명종 9년(1179) 경대승이 허승에게,

“내가 흉악한 무리들을 제거하고자 하는데, 네가 따라만 준다면 일이 성공할 것이다.”
라고 의논하자 허승이 승낙하니 경대승이 이렇게 지시했다.

“장경회()가 끝나는 밤에는 숙위하는 병사가 반드시 모두 피곤해서 잠들 것이다. 내가 결사대 30 여명을 화의문() 밖에 매복시킬 테니, 너는 먼저 안에서 정균을 죽인 다음 휘파람소리로 신호를 보내면 내가 복병을 출동시켜 나머지를 처치하겠다.”

밤 4경에 허승이 정균의 숙직소로 들어가 그를 죽이고 휘파람을 불자, 경대승이 결사대를 이끌고 왕궁의 담장을 넘어 들어가서 대장군 이경백(), 지유() 문공려()를 죽인 후 눈에 띄는 사람마다 모조리 다 살해했다. 궁궐 안에서 고함소리가 들리고 칼날이 마구 부딪치자 왕이 몹시 놀랐는데, 경대승이 침전 밖에 와서, “신들이 사직을 보호하고자 함이니, 주상께서는 두려워 마소서.”라고 큰 소리로 아뢰었다. 왕이 궁궐 문을 나와서 경대승 등을 불러 손수 술을 내려주고 위로하자, 경대승은 왕에게 금군()을 출동시켜 정중부와 송유인 부자를 체포해야한다고 말했다.

정중부 등이 변고를 듣고 도망쳐 민가에 숨어 있는 것을 모조리 다 체포해 목을 베어 큰 거리에 매달았다. 왕이 경대승을 불러, “정균의 승선() 직을 경에게 주고자하는데 어떠한가?” 하고 묻자, 경대승은 “신은 글자를 알지 못하오니 감히 바랄 바가 아닙니다.”라며 사양하였다. 왕이, “경이 아니면 누가 마땅한 사람인가? 이부시랑() 오광척()이 어떠한가?” 하고 다시 묻자, “승선은 왕명을 출납하는 직이니, 유학()을 하는 사람이 아니면 불가하옵니다. 오광척이 글은 조금 알지만, 역시 무신이니 정균과 같을까 두렵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왕은 아무 말이 없었다. 경대승은 오광척이 필시 승선으로 임명될 것으로 판단하고 그를 꺼렸다. 경대승의 족형인 장군 손석()이 평소 오광척과 원한이 있었으므로 경대승을 꾀어 함께 그를 살해한 다음, 권세가 네 명과 같은 일당인 장군 김광영()과 지유() 석화()·습련() 및 중랑장() 송득수()·기세정() 등을 각각 체포해 처형시켰다.

조정의 신료들이 대궐로 나아가 하례하는 자리에서 경대승이, “임금을 시해한 자가 아직 살아있는데 어찌 하례를 받겠는가?”라고 하니, 이의민()이 이 소식을 듣고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어떤 무반들은,

“정시중( : 정중부)께서 앞장서 대의를 부르짖고 문신들을 억눌러 여러 해 쌓인 우리들의 울분을 씻어 줌으로써, 무반의 위세를 펼친 공이 막대하다. 이제 경대승이 하루 아침에 네 분의 대신을 죽였으니 누가 그를 토벌할 것이냐?”

고 공공연히 떠들었다. 경대승이 겁이 나 결사대 백 수십 여명을 모아 자기 집에 두고 변란에 대비해 훈련시키면서 이를 도방()이라 불렀다. 긴 베개와 큰 이불을 만들어 두고 번갈아 숙직하게 했으며, 어떤 때는 자신이 그들과 같은 이불을 덮고 자면서 성의를 과시하기도 했다. 얼마 후 사직하고 사저에 살았지만, 국가의 중대사가 벌어지면 반드시 조정에 나아가 간섭하고 결정을 내렸다. 경대승이 정중부와 송유인을 제거한 이후부터 마음이 불안하여 항상 몇 사람을 큰 거리로 보내 몰래 정황을 살피게 하였다. 어쩌다가 유언비어를 들기만 하면 즉시 잡아 가두고 국문했기 때문에 큰 옥사가 여러 차례 일어났으며, 매우 혹독한 형벌이 가해졌다.

당시 개경에 강도떼들이 마구 설치며 자신들을 경대승의 도방이라 일컬었다. 해당 관청에서 체포해 옥에 가두면 경대승이 그때마다 석방하니 이로 말미암아 강도들이 약탈을 거리낌없이 공공연하게 자행했다. 경대승의 문객()이 양가의 자제를 대로상에서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관가에서 체포하여 죄를 다스리려고 했지만, 경대승이 극력 힘써준 바람에 방면되었다. 허승·김광립 등은 경대승과 같이 공을 세운 것을 내세워, 교만하고 방자하게 행동하면서 몰래 불량배[]를 양성하였다. 또 세자를 측근에서 모신답시고 세자궁의 뒤 벽 쪽에 기거하면서 밤새도록 노래와 풍악판을 벌이는 등 방약무인하게 굴었다. 경대승이 이를 꺼린 나머지 허승을 자기 집에 불러다 살해했으며, 또 길에서 김광립을 만나자 바로 죽여 버렸다. 그리고 군사를 동원해 자신을 경호시키면서 왕에게는,

“허승 등이 제멋대로 굴면서 신을 죽이려고 할 뿐만 아니라, 반역까지 도모했습니다. 일이 급박해 주상께 아뢸 겨를도 없이 먼저 그들을 죽였습니다.”
라고 보고했다. 왕이 측근 신하를 시켜 그를 위로하였으며, 재상 이하 관리도 모두 그 집으로 찾아가거나 혹은 글을 올려 축하했다. 이후 경대승도 점점 안도하며 군사로 경호하는 일을 중지시켰다.

명종 11년(1181) 전 대정() 한신충()·채인정()·박돈순() 등이 반역을 도모하자, 영사동정() 대공기()가 탐지하고서 경대승에게 보고했다. 경대승이 왕에게 아뢴 후 이들을 체포해 신문한 결과, 석화와 별장() 박화()·주부(簿) 이돈실()도 연루되었다는 자백을 받았다. 이에 한신충·채인정·박돈순 등을 섬으로 유배하고, 석화를 남해현령(), 박화를 하산도구당사(使)로 좌천시켰으며, 이돈실은 광주( :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로 유배보냈다. 왕이 내심 경대승을 꺼리면서도 겉으로는 두터운 은총을 과시하려고 매일 진수성찬과 의복 및 보화를 내려주었으며, 그가 요청하는 것은 그대로 다 들어 주었다. 그런 까닭으로 많은 사람들이 아부했지만, 학식이나 용맹 혹은 지략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경대승이 다 물리치니, 무반들이 다들 그 위세를 두려워해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하였다. 명종 13년 경대승이 갑자기 꿈에 정중부가 칼을 잡고 큰 소리로 꾸짖는 꿈을 꾸고 나서 병을 얻어서 죽으니 그 때 나이가 서른이었다. 장례를 지내는데 길가는 사람들이 슬피 통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경대승이 정중부를 토벌할 당시 견룡군() 김자격()의 조력이 컸으므로 경대승이 그를 아껴 도방을 다스리게 했다. 경대승이 죽자 도방에서 돈을 추렴하여 장사지낸 후, 장차 해산하려고 다시 모여 술을 마셨는데 김자격이, “경대승의 도방이 자주 회합하는 것은 장차 반란을 일으키기 위함입니다.”라고 무고했다. 왕이 본래 경대승을 꺼렸으므로 중방에 명하여 그들을 체포하게 하고 대장군 정존실()·오숙() 등으로 하여금 죄를 다스리게 했다. 잠시라도 도방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은 모조리 체포되었으며, 혹 도피해 숨으면 부모와 처자 및 친척까지 붙잡아다 고초를 겪게 하니 숨은 자들이 제발로 자수하거나 자살해버렸다. 이렇게 모두 60여 명을 체포하자 다시 정존실 등에게 지시해 혹독한 고문을 가하여 일당을 끝까지 찾아내게 했다. 또 내관( : 환관)들에게 형벌이 가혹한지 느슨하지를 규찰하게 하니 더욱 혹독한 매질이 가해졌다. 먼 섬으로 유배간 사람들도 대부분 중도에서 죽어버려, 산 사람은 네댓 사람에 불과했다.

오광척()의 부친 오정()은 한때 낭장()을 지냈는데, 서도(西 : 지금의 평양특별시)가 반란을 일으키자 인종은 오정을 시켜 조서를 지니고 가 은밀히 여러 성을 설득하게 하였다. 오정이 조서를 옷 속에 숨긴 채 지름길을 도보로 가다가 순찰 군사들에게 잡혀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 때 어떤 추녀가 옥바라지를 해주자, 오정이 이를 고맙게 여겨 부부되기를 약속하고 오광척을 낳았다. 뒤에 오정은 공적을 쌓아 상서()까지 승진하고, 늙어서 사직했는데 정실부인과의 사이에 아들이 없었기에 오광척을 데려다가 뒤를 잇게 하였다. 그는 견룡대정()이 되었지만 유사()와 어울려 놀기를 즐기고, 무를 좋아하지 않았다.

의종 말에 별장()·견룡행수()로 있다가 이의방()과 평소에 친하였으므로 천우위장군()에 임명되었으며, 다시 금오위장군()·이부시랑()이 되었다. 명종이 3품직에 임명하고자 하니 오광척은, “신이 젊은 나이에 4품에 임명되고, 또 이부를 겸하였으니 이것으로도 족합니다.”라며 사양하고, 양주도()·충주도()의 찰방사(使)로 나갔다. 당시 손석의 아비가 수주사(使)로 있었는데 성질이 탐욕스러워 늘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하므로 백성들이 괴로움을 겪고 있었다. 손석이 아비가 쫓겨날까 염려하여 오광척에게 애걸했으나, 오광척이 듣지 않고 그를 탄핵하여 파면시켰다. 이 때문에 손석이 오광척과 사이가 벌어져 결국 경대승을 꾀어 그를 죽이게 된 것이다.

경대승[慶大升] (국역 고려사: 열전, 2006.11.20, 경인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