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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면 구룡리 오 연신도비(文義面 九龍里 吳 連神道碑)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문의면 구룡리 오 연신도비(文義面 九龍里 吳 連神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2. 10. 14:53

 

오 연(吳 連)의 신도비가 있는 구사리는 낙안오씨들의 집성촌이다.

 

구룡리는 면의 동부에 위치하며 동은 마동리, 서는 산덕리, 남은 문덕리, 북은 괴곡리와 접하고 있다. 마을 대부분이 산지이며 서쪽과 동쪽에 골짜기가 형성되어 자연부락이 발달하였다. 마을의 주된 부락은 구사리 마을이며 마을 앞에는 구사리 방죽이 있다.

 


구사리 서쪽 산기슭에는 오룡동 마을이 있고 오룡동 남쪽 뒤에는 열망굴 마을이 연이어 있으며 열망굴에서 남쪽의 산덕리로 넘어가는 검은 바위골 골짜기가 있다. 마을 동쪽에는 묘암리와 연결하고 있는 묘암 마을이 있고 묘암 북쪽에는 시어티 마을이 있다. 교통이 불편한 마을이었으나 최근에는 편리한 지역이 되었다. 현재 90호 정도 거주하고 있다.

 

 

 

오련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는데, 호성공신(毫聖功臣)의 교서를 반급할 때의 별교서(別敎書)에는 “오련․이희령(李希齡)은 3등에 책훈하고,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품계와 관작을 한 자급(資級) 초천(超遷)[직위 등의 등급을 뛰어 넘음]한다. 그들의 부모와 처자도 한 자급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여서를 가계(加階)[가계를 올림]하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석성군의 ‘석성’은 충청남도 석성인데 봉작 시 작호는 대체로 본관을 중심으로 한다.

구사리 마을에는 석성군을 모시고 있는 석성제(石城齊)가 자리하고 있다.

 

 

 

 

 

 

구룡리의 으뜸 마을. 상구리와 하구리로 나누웠으나 지금은 구사리로 불리운 다. 옛날 아홉 진사가 났다는 설과, 한집안에서 선비가 9명이 나왔다는 설도 있다. 또 한편으로 한 집안에 여 러 형제가 살았던 바 서로 지청을 모실려고 집안에서 다투었다해서 구사리라 했다는 설도 있다. 보편적으로 문의현에서 9리 되는 부락으로 이름있는 선비가 사는 마을이라 부른 듯 하다. 낙안 오씨의 집성촌으로 이어 져 오고 있다.

 

 

 

 

 

신도비의 건립시기는 단기4288년(서기 1955년)에 후손들의 의해서 세워졌다.

구사리는 낙안오씨 집성촌으로 석성군 오연의 후손들로 누대를 이어 정착하여 거주한 곳이다.

또한 열망골과 오룡동은 경주최씨 집성촌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낙안오씨의 낙안(樂安)은 전라남도(全羅南道) 승주군(昇州郡)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는 백제시대의 분차군(分嵯郡 : 分 郡이라고도 한다)인데, 통일신라의 경덕왕 때 분령군(分嶺郡)으로 개명하였으며, 고려시대에 낙안군으로 개칭하여 나주(羅州)에 속하게 하였다. 1172년(명종 2)에 현(縣)으로 강등되었다가 후에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조선시대에도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고 군으로 승격하기도 하였느데, 선조 때 군(郡)이 되었다가 1908년(융희 2)에 순천군(順天郡)과 보성군(寶城郡 두 군데 갈라서 편입되었다.
낙안오씨(樂安吳氏)의 시조(始祖) 오사룡(吳士龍)은 고려(高麗) 때 삼사 좌윤(三司左尹)을 지내고 외적(外敵)을 토벌한 공으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고 낙안군(樂安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後孫)들은 낙안(樂安)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8세손 척지(陟之)가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뒤 경연관(經筵官)을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가문의 인물을 살펴보면 척지(陟之)의 아들 백안(伯顔)이 세조(世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이조 참조(吏曹參判)·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등을 역임하였으며, 손자 원로(元老)가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광주목(光州牧)의 교수(敎授)를 지냈다. 이외에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라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된 철검(哲儉),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던 경홍(景弘)·경의(景毅) 형제와 희기(喜麒), 그리고 임진왜란(壬辰倭亂)때 공을 세워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석성군(石城君)에 봉해진 연(連
)이 있다.
무신(武臣)으로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 참군(訓練參軍)을 지낸 흡(洽)과 역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칠원 현감을 역임한 시준(時俊),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한 덕근(德根)이 가문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