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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원면 미원리 쌀안장터 만세운동기념비(米院面 米院里 쌀안장터 萬歲運動紀念碑)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미원면 미원리 쌀안장터 만세운동기념비(米院面 米院里 쌀안장터 萬歲運動紀念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3. 4. 12:30

 

미원면 미원리 약물내기옆에 자리하고 있는 쌀안장터만세기념비이다.

현충시설로 지정되여 보존되고 있으며 미원 쌀안장터와 관련이 있는 주동적인 인물을 국가보훈처에서 찾아서 아래와 같이 기술해 본다.

 

 

 성규원은 충북 청원(淸原)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30일 충북 청주군 미원면(米院面) 미원리(米院里) 시장 네거리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미원의 만세운동은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이수란(李水蘭)·신경구(申敬求)·이용실(李容實) 등의 주도로 계획되어졌다. 이들은 미원 장날인 3월 30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는 한편 동지를 규합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성규원은 이 때 만세운동 계획에 참가하였다.
  거사 당일 오후 1시를 기해 성규원 등은 거사 장소인 미원 장터에 집결하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다음 미리 준비해 온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만세시위에 들어갔다. 그런데 만세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 헌병이 시위군중이 흔드는 태극기를 빼앗으면서 주동인물인 신경구를 체포하였다.
  이에 격분한 1천여 명의 시위 군중은 신경구를 구출하기 위해 주재소로 몰려가서 석방을 요구하였다. 시위군중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일경은 시위대를 탄압하게 되자 군중들은 투석으로 맞서다가 급기야 주재소의 담장과 유리창, 기물들을 파괴해 버렸다.
  그리고 만세시위는 다음날인 3월 31일에도 계속되었고, 4월 1일에는 청원시장에서 만세시위를 마치고 돌아오는 천도교들 3백여 명이 산위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는 등 항일분위기가 솟구쳤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5월 5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인보 선생 (1878. 4. 9. - 1951. 12. 16.) ◈1990. 건국훈장 애족장◈ 충북 청원(淸原) 사람이다. 1919년 3월 30일 하오 2시경 미원면(米院面) 미원(米院) 장터에서 신성휴(申聖休) 등과 같이 군중 1,000여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또한 일헌병의 대검을 탈취하려 하는 등의 항일활동을 하다가 피체되었다. 동년 5월 5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6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며 동년 8월 16일에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청주보훈지청·충주보훈지청·광복회 충북도지부는 선생의 서거 55주년을 기념하여 2006년 12월‘우리고장 출신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신학구는(1877-1968)충북 청원(淸原) 사람이다.1919년 당시 청원군 낭성면(琅城面)에 거주하였으며 미원면(米院面)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미원의 만세운동은 그 동원된 수와 규모에 있어 청주에서 일어난 3·1독립운동 중에서도 가장 괄목할만 하였다.1919330일 이곳 미원 장터에서는 오후 1시터 1,000여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앞장서서 시위운동을 주도한 14명이 피체되면서 군중은 더욱 격앙되어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를 습격·파괴하였다.

이때 그는 신정식(申鼎植서정열(徐正烈)등과 함께 지팡이와 몽둥이를 손에 들고서 장을 보고 돌아가는 장꾼들에게 정의의 독립만세운동 대열에 참가할 것을 설득하는 등 주도적으로 활동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이해 55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장일환(1882-1919)은 충청북도 청원(淸原) 사람이다.

1919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활약한 한봉수(韓鳳洙)로부터 고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부탁 받고, 동지들과 상의하여 330일 부락민을 동원하였다.

이날 미원(米院)장터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주재소 앞길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다 시위군중의 기세에 놀란 일본경찰들의 발포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